[바른말 광] 915. 처바르고, 쳐부수고
‘청소년들은 22세기를 배경으로 빛보다 빠른 제비호를 타고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악의 무리를 처부수는 라이파이의 영웅담에 열광했다.’
어느 신문 기사 구절인데, ‘처부수는’이 틀렸다. ‘처부수다’라는 우리말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쳐부수다’를 써야 한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쳐부수다: ①공격하여 무찌르다.(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쳐부수었다./영광된 조국 통일을 염원하면서 공산배들을 쳐부순 후 대한의 씩씩한 남아답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홍성원, 육이오〉) ②세차게 때려 부수다.(도끼로 문을 쳐부수다.…)
이 ‘쳐부수다’는 ‘치다’와 ‘부수다’가 결합한 ‘치어+부수다’가 줄어든 말. 쳐내다, 쳐들어가다, 쳐들어오다, 쳐올리다도 모두 같은 ‘치어+○○○’꼴이다. 반면 이 ‘쳐’와 종종 헷갈리는 접두사 ‘처-’는 ‘마구, 많이’라는 뜻이다. 표준사전을 보자.
*처-: (일부 동사 앞에 붙어)‘마구’, ‘많이’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처먹다./처넣다./처바르다./처박다./처대다./처담다.)
그러니 ‘바닥은 온통 시멘트로 처바른 상태였다’이고, ‘오른손을 쳐올려 삿대질을 했다’라야 한다. 그러면, ‘그는 당장 돌로 ‘쳐죽일 듯이/처죽일 듯이’ 달려들었다’에서는 어느 걸 써야 할까. 일단 우리말에 ‘쳐죽이다’도 없고 ‘처죽이다’도 없으니 둘 다 실격. 다만 돌로 ‘쳐서’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는 뜻으로 ‘쳐 죽일 듯이’를 쓰면 된다. 접두사‘처-’에 ‘죽이다’가 결합한 꼴로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마구 죽이다/많이 죽이다’라는 뜻이 아니므로 자연스럽지 않다.
‘박정환이 한번 잡은 우세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여 2연승을 올렸고 내쳐 이 3국에서도 이미 주도권을 잡았다.’
어느 바둑대회 해설 기사 가운데 한 구절이다. 한데, 여기서는 ‘내쳐’가 잘못. 이 말을 분석하면 ‘내치+어’가 되는데, ‘내치다’가 ‘손에 든 것을 뿌리치거나 던지다, 강제로 밖으로 내쫓다’이므로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이 자리에는 ‘어떤 일 끝에 더 나아가, 줄곧 한결같이’라는 뜻인 ‘내처’가 와야 했다. ‘옷을 벗은 김에 내처 욕실 청소를 했다/심청이가 팔려간 뒤 내처 앓던 심봉사는 사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처럼 쓴다. 반면 ‘내쳐’는 ‘수세에 몰리던 관군은 도적들을 성밖으로 내쳐 한숨을 돌렸다’처럼 쓰면 된다.
‘힘이 들었는지 그는 축 쳐져 있었다.’
여기에 나온 ‘쳐져’도, 우리말에 ‘쳐지다’가 없으니 나올 수 없는 활용꼴. 이 자리에는 ‘처지다’를 활용한 ‘처져’가 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