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18. 전 재산을 말아 먹어?
〈명분 없는 투표시간 연장 반대〉
어느 신문 칼럼 제목이다. 칼럼은 투표시간 연장 반대가 명분이 없다는 내용을 다뤘다. 한데, 이 제목은 좀 모호한 구석이 있다. 투표시간 연장이 명분이 없어서 반대한다는 뜻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명분 없는’이 ‘투표시간 연장 반대’가 아닌 ‘투표시간 연장’만을 꾸밀 수도 있는 구조여서 그렇다. 그러니 본문에 맞추자면 〈명분 없는, 투표시간 연장 반대〉나 〈투표시간 연장 반대, 명분 없다〉라야 했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명분 없는 ‘투표시간 연장 반대’〉나 〈‘투표시간 연장 반대’ 명분 없다〉로 작은따옴표를 활용하는 것. 간단한 문장부호 하나로 혼란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문장부호 못지않게, 띄어쓰기도 깔끔하게 정리하는 힘이 대단하다. 아래를 보자.
‘안전한 원전 해체.’
이 말은 ‘안전하게 원전 해체를 한다’는 뜻으로 썼는데, ‘‘안전한 원전’을 해체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러니 ‘안전한 ‘원전 해체’’라야 헷갈리지 않을 터인데, 아래처럼 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안전한 원전해체.’
이렇게 붙여 쓰면 어쩔 수 없이 ‘안전한’은 ‘원전’이 아니라 ‘원전해체’ 전체를 꾸밀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게 바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띄어쓰기의 힘이다. 아래는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에 나오는 구절.
‘문어의 조리법과 약효를 규합총서에서는 “돼지같이 썰어 볶으면 그 맛이 깨끗하고 담담하며, 그 알은 머리·배·보혈에 귀한 약이므로 토하고 설사하는 데 유익하다. 쇠고기 먹고 체한 데는 문어대가리를 고아 먹으면 낫는다.” 하였다.’
여기서도 띄어쓰기가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말이 있다. 바로 ‘문어대가리’라는 말.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보자.
*문어대가리: 문어의 대가리라는 뜻으로, ‘대머리’를 낮잡아 이르는 말.
즉, ‘문어 대가리’로 쓰면 말 그대로 문어 대가리이지만, ‘문어대가리’로 붙여 쓰면 대머리를 낮잡아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 그러니 나무위키 설명은 인육을 먹으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띄어쓰기 한 번 잘못하면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뜻이 바뀌어 버린다.
비슷한 것으로는 ‘문어 발/문어발’이 있는데, ‘문어발’로 붙여 쓰면 ‘문어의 발처럼 여러 갈래로 나눔’이라는 뜻이 된다. 문어발식 사업 확장, 문어발 인맥처럼 쓰는 것.
이러니 ‘귀신같다/귀신 같다’도 ‘귀신같은 솜씨/귀신 같은 생김새’로 구별해야 하고, ‘말아먹다/말아 먹다’도 ‘전 재산을 말아먹었다/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처럼 구별해 써야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