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가져오는 분열의 의미
누가복음 12장, 새번역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51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54 예수께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1세기, 이스라엘 사회는 복잡한 정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분출될 것만 같던 반로마 정서는 결국 무력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열정적 광신도를 영어권에서 젤롯(zealot)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열심당원'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젤롯으로, 유대 종교와 민족주의에 심취해 있는 열혈당원을 가리킵니다.
열심당원들은 시카(sica)로 불리는 단검을 들고 다녔는데, 이들 무장한 사람들을 시카리(Sicarii)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 앞에 쓰인 '가룟'으로 음역된 단어는 이스카리옷(Iscariotes)인데, 이를 시카리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유다를 열심당원 출신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단어가 훗날 남미권에서 암살자를 말하는 '시카리오'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의 앞잡이들을 몰래 암살하기도 했습니다.
레자 아슬란(Reza Aslan)은 <젤롯>에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자객은 군중 틈을 비집고 들어가 대제사장 요나단에게 바싹 다가갔다. 몰래 손을 내밀어 대제사장의 성스러운 예복을 움켜쥐고는, 그를 휙 잡아채 성전 경비병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러고는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꽉 붙잡고, 순식간에 단검을 빼 그의 목을 그었다. 또 다른 종류의 희생 제의인 셈이다. 대제사장의 피가 성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제사장이 주저앉는 것을 경비병들이 느끼기도 전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군가가 눈치 채기도 전에, 자객은 군중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 자객이 “살인이다!”라는 말을 가장 먼저 외쳤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무력이 무력을 불러오는 악순환의 사회였습니다. 로마의 창칼에 열심당원들은 반항했고, 로마는 더욱 큰 창칼로 이스라엘을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의 저항은 비극적 막을 내리게 됩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 지배에 반발하여 무력 투쟁을 벌였고, 열심당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들이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끝까지 항전을 벌였습니다. 최후의 목숨까지 앗아간 마사다 항쟁이었습니다.
복잡다단한 상황에서도 시대를 분간할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랑과 평화를 호소했지만, 역설적으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대항적이며 대안적인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가정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며 동생들이냐?"라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막 3:31-35, 새번역).
예수님이 인용한 미가서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본다.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린다. 내 하나님께서 내 간구를 들으신다.(미 7:6-7)
열심당원의 운동과 예수님의 운동이 충돌하는 핵심 지점이 바로 힘(무력)과 권력 사용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당신의 대업을 이루기 전에 완수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통과의례로 이해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힘과 권력의 방식이 아니라, 기꺼이 가난해지고 연약해지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에서는 여러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위에 서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열위에 서서 상대의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들을 무능하고 어리석은 패배자로 조롱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세상에 분열을 야기하고 일으키는 것이라면, 그대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우리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와 달리, 우리의 태도와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깨어나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