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스러운 하나님

완전에서 사랑으로

by 후추
출애굽기 32장, 새번역

7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8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9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1 모세는 주 하나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12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13 주님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14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960px-Nicolas_poussin,_adorazione_del_vitello_d'oro,_1633-34FXD.jpg Nicolas Poussin, "The Adoration of the Golden Calf"


다이아몬드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아다마스(adamas)는 '깨지지 않는'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단단한 특성 때문입니다. 영국의 다이아몬드 기업이 만든 "다이아몬드는 영원합니다"라는 마케팅 문구는 영원한 사랑의 징표로 다이아몬드를 소비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영원불변한 다이아몬드를 가치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은 유한하고 가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타당한 진리를 일컬어 절대적 진리라고 합니다. 절대적 진리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불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어릴 적, 교회 장로님들의 기도문에 빠지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찬미는 언제나 그렇듯이 대표기도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 하나님. 그 이름대로 유일하시고, 스스로 계시기에 자기충족적인 하나님.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믿음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철학 전공수업 중에 신의 완전성, 자족성(그 자체로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상태)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토론에 자신이 있었고, 당시 지도교수님도 기독교인이었던 터라 제 논리를 변호해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토론이 마친 후, 교수님의 총평을 들어보니 저는 토론에서 완전히 낙제했습니다. 신념에 이끌려 논증했고, 결국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얼굴이 시뻘개졌습니다. 나의 신념이 교회 밖 세속사회에서 아무런 변론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무지성, 맹목적 신앙인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족성을 변론했지만, 그것을 변론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신앙이 사회와 고립되어 있던 걸 뼈저리게 느끼며 충격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읽으니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순간돌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백성을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말립니다. 어쩌면 하나님보다 모세가 더욱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하,
그가 화를 내어 그 백성을 데려내다가
산골짜기에서 죽여 없애버리고 땅에 씨도 남기지 않았구나’ 하는 말을
이집트인들에게서 들으시려 하십니까?
제발 화를 내지 마시고 (출 32:12, 공동번역)


모세의 중재에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실수하지 않으시고 번복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모습이 일순간 흔들립니다. 모세의 중재에 하나님은 금세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럽게 자신의 말을 금방 바꾸시게 될 걸 미리 알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의 전지전능, 무소부재, 영원불변은 거짓일까요?


정호승 시인은 〈작은 기도〉라는 시에서 "누구나 사랑 때문에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스스로 가난해지는 선택과 같습니다.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자아를 포기하고 자발적 을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아(我)는 손(手)에 창(戈)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사람, 자아가 강한 사람은 손에 큰 창을 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주변 사람을 찔러 상처 내고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자아를 포기하고 가난해진 사람은 다릅니다.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사랑은 애타게 하며, 무한한 자유를 포기하고, 거리낌없이 스스로를 옥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명사적 의미에서의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동사적 의미에서 하나되게 하고 합일되게 하는 하나님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적 가르침을 떠올릴 만합니다. 성경을 통해 교조적 가르침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움을 떠올리는 한 주를 보내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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