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獨善)의 심리학

왜 착한 사람이 더 독선적인가

by 후추
누가복음 18장, 새번역

9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심리 상태나 태도를 독선(獨善), 영어로는 self-righteous라고 합니다. 독선은 악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평범한 사람, 심지어 도덕적 완벽주의자에게 흔히 나타납니다. 독선이 강한 사람은 외관상 단단하고 강인해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내면적으로 취약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자신의 불안감을 가리기 위해 독선을 방어기제로 활용하여 자기안정감을 얻으려는 시도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합니다. 이러한 불완전한 모습은 안정감을 유지하려는 자아의 욕구와 상충합니다. 따라서 외부의 비판이나 내적 의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독선은 방어기제로 작용합니다. 독선은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 또는 정체성이 흔들릴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독선은 개인의 심리적 방어기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의 선함과 옳음을 바탕으로 타인을 계도해야 한다는 신념은 집단의 의식으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계몽주의와 엘리트주의는 독선의 사회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무지한 민중을 계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엘리트주의는 "교육받고 합리적인 엘리트가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종교적 독선은 "우리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배타적 확신으로 드러납니다. 집단의 독선은 집단의 정체성으로 강화되면서 더욱 견고한 구조를 형성합니다.


집단적 독선의 위험성은 개인의 심리적 방어와 사회적 특권, 제도적 권력이 결합된다는 점입니다. 개인이 가진 불안과 취약성은 집단의 우월감으로 은폐되고, 피아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착취를 정당화합니다. 결과적으로 독선은 일관성의 부족으로 이어지며, 개인을 넘어 사회적 갈등, 관계의 파국을 초래합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를 독선의 본질을 이해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 모두 당대 사회의 착취 구조에 연루된 인물이었습니다.


세리는 부도덕한 인물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로마 사회에서 세리는 여행객이나 무역상에게 통행세와 관세를 징수했습니다. 로마의 세금 징수 방식은 입찰을 통해 최고 액수를 제시한 세리장에게 관할 지역의 관세 및 통행료 징수권을 파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세리장은 정해진 세금 외에 추가적인 통행료와 관세를 거둬들여 자신의 수익을 증식시켰고, 사람들을 고용하여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세리는 세리장이 고용한 하급 세리로, 사회적 지탄을 받을지라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리직에 종사하던 하층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식민지 로마 제국의 경제적 착취 구조의 말단에서 생존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세리가 경제적 착취자였다면, 바리새파는 종교적 착취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농부들은 소출의 20% 이상을 종교세로 지불해야 했으며, 대부분 소작농이었던 농부들에게 이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종교세를 거둬들여 회당과 성전의 운영비로 사용했기 때문에 종교세는 바리새파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의 종교세는 의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세리의 이익이 많아질수록 바리새인의 이익은 줄어드는 경쟁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을 프로파간다, 이데올로기로 사용하여 종교세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인 낙인을 찍었습니다. 종교세를 납부하지 못한 이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추방되었고, '땅이나 파먹는 더러운 인간들'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통해 특권을 정당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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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착취의 상징과 같았던 헤롯 성전에서 바리새인은 기도를 올립니다. 헤롯 성전의 지붕과 성소 내부가 황금판으로 덮여 있었다는 것이나 성소에 황금 포도나무 장식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헤롯 성전이 민중들을 착취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는데, 이는 그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고 고된 육체 노동을 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바리새인은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만, 그의 기도는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죄인을 멸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성전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바리새인도 세리보다 그다지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기도는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한 반면, 바리새인은 자신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의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세리는 자신의 취약함과 죄를 인정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의 독선은 하나님 앞에서 불안한 내면을 감추는 방어기제였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의 특권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며 불완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연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독선적 심리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가늠자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의 불확실성을 연습하고, 자신의 취약함과 불안을 가리는 심리적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속한 집단의 정체성, 전문성, 도덕적 우월감이 우리를 독선으로 이끌 때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인간은 확신을 유지함으로써 쾌감을 반복 학습합니다. 집단은 "우리"의 옳음을 확신함으로써 결속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안정감입니다. 진정한 안정감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이어가는 데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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