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장 33-43절, 새번역
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살아 있는 채로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합니다. 일본 불교에서는 승려가 스스로를 미라로 만들어 불상의 형태가 되는 즉신불(卽身佛)이라는 극단적 수행법이 있었습니다.
오래전, 어떤 만화에서 법력이 높은 승려가 백성들을 위해 즉신불이 되기로 결심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내가 죽으면 즉신불이 되어 영원토록 이 땅의 불쌍한 백성들을 구하겠네.
하지만 땅속에 묻히려는 순간 그는 절규합니다.
싫어...! 비로소 후회가 나를 덮쳤다. 삶에 대한 집착과 어둠에 대한 압도적 공포..! 나는 사람들을 위해 온 힘을 다 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야!
어린 나이였지만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성인의 인간적 고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 만화의 내용이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뒤늦게 생각했습니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십자가에서 내려가고 싶은 인간적 욕망과, 자신이 정말 메시아인지에 대한 두려움을 겪습니다. 이러한 발칙한 상상 때문에 카잔차키스는 죽을 때까지 정교회로부터 비난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성인도 우리처럼 두려움과 고뇌를 겪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기에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단지 흥미로운 관찰에 그칠 뿐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인간적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셨는가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은 ‘용서’라는 실천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모범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셨는가?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고, 군중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그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보복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용서와 평화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기에 죽음의 두려움, 분노와 원망의 감정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웃는 무리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인간적 한계와 고통 속에서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참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용서는 초대교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용서의 실천이 삶의 방식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도 단순히 "예수님도 인간이었다"는 신앙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겪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원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 평화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은 바로 용서의 맥락 속에서,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모범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