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이후의 성탄

by 후추
마태복음 1장, 새번역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기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팔레스타인의 작은 소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이 해마다 반복되며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이 사건이 지닌 급진성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전능자의 뜻이 10대 소녀의 몸을 힘입어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작고 연약한 인간 존재를 통해 일하시기를 선택하셨다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존엄과 더불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할수록, 우리는 자연스레 참인간이 되는 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린 어떻게 참인간이 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의 성탄 사건에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눈에 띕니다. 각 장면은 각각 독립된 교훈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증언하며, 점차 한 중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장면은 성탄의 방식이 지닌 연약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봄이 필요한 아기의 모습으로 어린 소녀의 자궁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연약한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되는 자리가 됩니다. 반인반신의 초월적 존재가 아닌, 완전한 인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창이 됩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요셉의 모습입니다. 마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흔히 의로움을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르고, 잘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단호한 태도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요셉의 의로움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임신 사실 앞에서 그는 분노하거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기 위해 조용히 파혼하려 합니다. 마리아를 보호하려는 이 섬세한 태도를 마태는 의롭다고 합니다. 정의를 외친다며 반사회적 주장을 일삼고, 의로워지기 위해 사회적 신의까지 저버리는 행동과는 결이 다릅니다. 요셉의 모습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정의의 이미지에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진정한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장면은 요셉의 꿈입니다. 요셉의 꿈은 허황된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창이 아닙니다. 그 꿈은 오히려 요셉을 더 위험한 선택으로 이끕니다. 그는 꿈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길로 나아갑니다. 이 장면은 애굽에서 야곱의 가족을 구원으로 이끌었던 야곱의 아들 요셉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가 굳이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이라 밝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 모든 장면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주제로 향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과 복잡다단한 현실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흔들리는 인간의 삶 속에 함께 머무르시며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최근 저는 토마스 켈리의 『영원한 현재』를 다시 읽으며 임마누엘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 곧 쉐키나의 영광을 의식하며 살아갈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는 내면으로 도피하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묵상했던 퀘이커 신자들이 노예제도와 고리대금, 전쟁이나 폭력 사용에 맞서 행동했던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만나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종교에서 우선적인 것은 이론이나 교의가 아니라 실천이며, 기독교적인 실천은 표면적인 행위 안에서 고갈되지 않는다. 그것은 뿌리가 아니라 열매이다. 실천하는 기독교인은 우선적으로 내면의 성소를 향한 영혼의 영원한 회귀를 실천하는 사람, 세상에 그 빛을 가져다주고 다시 판단하는 사람, 소란스럽고 변덕스러운 세상에 빛을 가져와 그것을 재창조하는 사람이다. (토마스 R. 켈리, 『영원한 현재』, 22쪽)


기도에는 ‘눈을 감고 하는 기도’와 ‘눈을 뜨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하는 기도는 고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 기도는 눈을 뜨고 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눈을 뜨고 하는 기도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를 바라보고 그 일하심에 함께하는 실천적 기도입니다.


성탄의 밤은 고요합니다. 우리는 그 고요 속에서 눈을 감고,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러나 성탄은 그 밤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통해 이 세상 한가운데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뜻에 응답하며 살아갈 때 성탄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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