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의 제자들은 어부였을까
마태복음 4장 18-22절, 새번역
18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1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갈릴리 북서쪽에는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마을들이 형성된 지리적 특성상, 예수님과 사역을 함께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직업이 어부였다는 사실은 자연스럽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두말하지 않고 껌뻑 따르는 모양새인데, 이 장면은 결단의 본보기로 보이며, 오늘날 우리의 단호하지 않고 우유부단한 신앙 태도와 대비되기도 합니다.
1986년, 갈릴리 호수 북서쪽 해안에서 1세기경의 고대 어선이 발견되었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호수 수위가 낮아지자 진흙 속에 묻혀 있던 배의 잔해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 배는 진흙에 덮여 있어 부패되지 않은 채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이 배는 바닥이 평평해 해안 가까이 접안할 수 있는 모양이었고, 열 가지 종류의 나무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목재가 매우 귀했거나, 오랜 기간 배를 수리하면서 탄 게 아닐까 짐작하게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배가 난파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가라앉혀진 흔적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선박의 부품들이 제거된 채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주가 왜 이 배를 스스로 가라앉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고, 혹은 배를 띄워 어업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손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대다수 농부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해 극심한 궁핍 속에 살아갔던 것처럼, 어부들 역시 결코 낭만적인 노동을 하고 있던 이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획세나 어업 허가권, 항구 사용료와 같은 각종 세금과 비용이 부과되었을 것이고, 배와 그물의 소유권이 지주에게 담보로 잡혀 있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어업은 삶을 유지하기는커녕, 하면 할수록 손해가 되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리 호수에 배를 급히 가라앉힌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어업이 지속불가능한 환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차라리 어업을 포기하고 일용직 노동자가 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물과 배가 더 이상 자신들을 살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희년’은 본래 농업 사회를 전제로 한 제도입니다. 땅의 회복과 토지 반환이 제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땅의 질서’ 바깥에 있는 어부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어부는 농부에 비해 ‘땅’과 무관한 사람이었고, 유대교의 희년 신학에서 다소 비껴나 있던 존재였습니다.
하필이면 변방의 갈릴리에서 어부들이 네 명이나 제자가 된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들은 제도와 권력, 성전 중심의 토지 질서와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제도적, 비권력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아닐까 싶은데요. 예수님이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사람을 지배하는 언어가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언가를 취하는 일이 아니라, 살려내는 일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인 것이죠.
제자가 되는 길은 자유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속박되는 것이라고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들은 자유롭지 않은 현실에서 참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에 단호하게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요. 예수님의 초대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말이 아니라, 이중삼중의 불합리한 현실에 맞서는 대안적인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망가진 세상 한가운데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었던 자신들을 구원할 유일한 분이 아닐지 기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대안적 제자도를 실천해가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