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sophia)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장 26-27절, 새번역
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작년 5월부터 시작했던 창업지원사업의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제품을 큰 가방에 넣어 끌고 다녔는데,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무척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점심식사를 위해 학생식당으로 이동하던 중, 교정 안에 위치한 호수가 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호수 쪽으로 옮겼습니다. 살얼음이 낀 호수 위에 연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대학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모교의 중앙광장에는 백마상과 분수대가 있었습니다. 분수는 물을 높이 쏘아 올렸고, 이따금씩 나는 그 앞에 서서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무지개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물줄기가 위로 솟아오를수록 더욱 큰 무지개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20대에는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삶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중력을 거스르는 분수대의 이미지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성취를 이뤄낼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각도 있었지만, 오로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성공이 종내에 추락해서 부서지고 말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경쟁과 부담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대도시였던 고린도 역시 성공을 지향하는 도시였습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성공의 가능성이 있었고, 그만큼 성공 서사가 도시 전반에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헬라 문화의 영향 아래 철학과 수사학이 인기를 끌었고, 누가 더 지혜로운지, 누가 더 유능한지를 가르는 서열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기에 능했던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탁월한 설교자를 이상적 목회자상으로 여기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세상의 지혜’는 헬라 철학이나 로마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힘과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의 연약함으로 ‘세상의 지혜’에 맞섭니다. 당시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반역자에게 내려지는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이야기는 반문화적입니다. 십자가는 황제의 권력, 그 권력을 대리하여 집행하는 시스템에 의해 내려진 선고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전하는 일은, 황제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닌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신앙은 반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일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함으로써 제국의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이 선언이 말에 그치지 않고 성도의 생활과 윤리로 증언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방식이 하나의 성서해석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성서 해석은 텍스트 독해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독해되어야 그 의미가 생환됩니다. 우린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형편에 따라 음식과 재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성서를 읽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와 방식이 켜켜이 쌓이고 축적될 때에, 우리도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토양 안에서 샘물의 근원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해석되고, 증언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