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언제 살아있는가

하나마나 한 말에 대하여

by 후추
마태복음 5장, 새번역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대학시절, 지도교수님은 독서할 때에 ‘저공비행’이 중요하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글의 문맥과 논지를 넘어서는 독서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글자들이 놓인 지면에 밀착해 비행해야만, 텍스트가 그려내는 지형과 지리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대로 글을 겸손하게 읽지 않고 ‘고공비행’을 하다 보면,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투사하게 되기 쉽습니다. 활자가 지시하는 세상과 무관하게 공상에 빠지게 됩니다. 대충 책을 읽을수록 고공비행하기 쉽고, 궤도를 이탈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읽은 뒤에 나오는 말들은 입 밖으로 내기엔 무의미합니다.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이 난무하게 되고, 하나마나 한 소리로 흘러가곤 합니다.


성서학자 헤르만 궁켈은 성서를 해석하며 ‘삶의 자리’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성서 본문이 기록된 구체적인 상황과 역사적 배경, 곧 삶의 정황을 가리킵니다. 성서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정황에서 쓰였으며, 그 정황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는 생각이 이 개념에 담겨 있습니다.


저공비행과 삶의 자리,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두 말을 자연스레 짝지어 떠올려 왔습니다. 둘 다 초월적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실체성과 구체성을 요하는 세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글은 삶의 대지에서 떠나는 순간 힘을 잃습니다. 나는 뒤늦게 멋있는 말과 의미 있는 말이 비례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심오한 주제와 아름다운 말은 매력적일 수 있지만, 삶의 터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금세 휘발해 버립니다. 멋있어 보이지만 무게 없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 표현, 삶의 중량을 견뎌내지 않은 문장들은 결국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무기력하고, 삶을 공허하게 만들 뿐입니다.


서예가 장일순 선생님은 “글씨는 반드시 삶 속에서 나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과 동떨어진 글씨는 죽은 글씨라는 뜻인데,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한 번은 누군가가 장일순 선생님께 “어떤 글이 정말로 훌륭한 글입니까?”라고 묻자,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길을 가다 보면 리어카나 포장마차에 ‘군고구마 팝니다’, ‘붕어빵 팝니다’라고 적어 놓은 글씨를 보지 않느냐고. 지렁이 같은 글씨라 하더라도 그런 글이야말로 생명력이 있는, 꼭 필요한 글이라는 것이죠.


나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통과하지 않은 교훈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어기고 가르치는 사람”과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을 대비하신 것은, 단순히 순종과 불순종을 가르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언행이 분리된 사람과 연결된 사람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막의 은수자들도 말하기보다 오래도록 금언을 수행했겠지요. 그래서 하늘에서 큰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행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전 28화제국의 지혜, 십자가의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