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함의 기억
출애굽기 17장, 새번역
7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 보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제도, 축적된 과학 지식이 만들어 낸 첨단 기술, 오랜 사유의 축적 위에 세워진 철학과 사상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도 봅니다. 전쟁과 폭력 앞에서 정교한 기술과 제도는 무력해지고, 고귀해 보이던 사상도 순식간에 타락합니다. 예컨대 독일 철학자들이 나치 정권에 협력했던 사실은 인간의 고상한 사유조차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줍니다.
인간 존재가 이렇게나 허약한지, 이렇게도 찌질해도 되는지 묻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인간의 도덕성을 과신합니다. 그러나 일상 속에 그 믿음은 쉽게 깨집니다. 평소에는 점잖고 선량해 보이던 사람이 운전대를 잡는 순간 도로 위의 야수가 됩니다. 공평과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일순간 차별주의자로 돌변합니다. 인간의 품격은 쉽게 무너집니다. 오래전, 나는 가끔 기품이 넘치던 어느 사람의 자켓 옷깃에 말라붙어 있던 밥풀 조각을 떠올립니다. 나는 고상한 인간이 한없이 볼품없고, 비겁하며 쪼잔해질 가능성에 대해 상상합니다. 누구나 제 자신의 찌질한 모습을 감추고 싶겠지만,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의 찌질함을 인정해야만 일말의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1970년대 한국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던 캐릭터 중 하나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술과 담배에 의존해 살던 상이군인이었습니다. 한때는 전장의 영웅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술과 담배에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하나같이 그들은 세상만사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어릴 적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늘날 PTSD에 시달리는 퇴역군인들의 모습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총검을 휘두르던 강인한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어린 새처럼 작고 연약합니다.
성서 역시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연이어 기적을 경험합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비로운 경험도 인간의 불안을 잠재우지는 못합니다. 당장 물 한 모금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묻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동서고금의 인간군상이 똑같습니다. 당장의 물 한모금 앞에서 고귀한 정신은 쉽게 흔들립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쉽게 무너집니다. 인간 존재의 가벼움과 찌질함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후대 유대인들이 성서를 편집하면서 찌질한 선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전승한 것도, 날것 그대로의 인간상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연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진흙탕 속에 한바탕 구른 인간의 역사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후대 유대인들은 날것의 인간상을 공동체의 기억 속에 아로새겼습니다.
농경 사회였던 이집트는 잉여 생산물을 저장하는 경제 체제였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곡식을 저장하고, 내년을 대비하며 삽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잉여 생산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의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출애굽 전환기에 인간이 느꼈을 근원적 불안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찌질한 역사를 포장하지 않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전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배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반복해서 기억합니다. 유월절 절기를 통해 선조가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이야기에 참여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선조들의 역사를 생환함으로써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노력입니다.
신앙이란 자기확신이 아니라, 기억의 예전에 참여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우린 우리의 찌질함을 인정하고, 동시에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해 오셨는지를 상기합니다. 신앙은 애써 인간의 찌질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나아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쉽게 불안해하고 쉽게 의심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여전히 묻습니다.
“신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확신이 아니라 생환된 기억입니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극복하는 기억입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기억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아남네시스, 기억에 동참하는 경건의 시간입니다. 그리스어 아남네시스는 과거의 사건을 상기하는 것을 넘어서, 기억을 통해 경험을 현재화 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을 현재 속에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95편 기자는 말합니다. “므리바에서처럼, 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찌질한 인간성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