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기에 대해
요한복음 9장, 새번역
25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앞을 못 보던 시각 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9:7). 뒤이어 요한복음 10장까지 이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을 치유하신 사건은 단 두 구절에 불과하지만(9:6-7), 그 이후 이어지는 사람들의 반응은 긴 분량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무언가 분량이 잘못 분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범상치 않은 일을 기대합니다. 예상할 수 없는 초월의 경험을 갈망합니다. 그동안 꿈꿨던 계획이 이루어지고, 오랜 질병이 치유되며 일확천금의 행운을 얻길 원합니다. 기적을 맞이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호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홀경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어느새 감정은 차갑게 식기 마련이고, 초월의 경험을 해체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이해불가한 사건을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정작 사건의 경이로움은 증발해버린 채, 사건을 둘러싼 해석과 의심만 남게 됩니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일종의 해석학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사족을 달고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려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의 개안(開眼) 사건을 둘러싸고 사람들의 반응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시각 장애인이 눈을 떴다는 사건이 아니라, ‘어떻게’ 그가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더욱 관심을 갖습니다. 9장부터 10장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각주만 넘쳐납니다. 바리새파를 비롯한 군중들은 방법과 경위를 캐물으며 변죽을 울립니다.
사건 ‘자체(itself)‘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about)’ 이야기만 거듭 반복됩니다. 심문과 변호가 난무하는 가운데, 엘리트 지식인들도 끝끝내 사건의 핵심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정작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진 이는 시각 장애인이었던 당사자였습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요 9:25) 코끼리를 눈앞에 두고, 코끼리에 관한 책만 뒤적이는 꼴입니다.
겸허한 진술과 관찰만이 진실에 가깝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해 가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예언자(9:17)’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9:33)’으로, 마침내 ‘주님(9:38)’으로—그의 인식은 점진적으로 깊어집니다. 그는 그렇게 진실에 이르게 됩니다.
얼마 전, 김훈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글을 쓰는 원칙이 있는지 묻고 답하는 영상이었습니다. 김훈 작가는 수다를 떨지 않는 것,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 문장의 뼈대만을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듭니다. 주어와 동사, 보어와 목적어만으로 깔끔하게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형용사와 부사는 되도록 빼고 핵심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가 오래도록 기자 생활을 했기에 더욱 그런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나를 비춰보았습니다. 나는 그의 원칙과 다르게 글을 쓰고 말합니다. 내 말엔 부사와 형용사가 가득합니다. 나를 포장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그 욕망은 보이지 않게 삶 곳곳에 우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변호와 그럴 듯한 꾸밈으로 진실에 다다르지 못하고 주변부만 맴돌 때가 태반입니다. 자기 마음을 직시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젠체하지 않고, 꾸밈 없이 나를 돌아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작가가 글을 쓰는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인지 모릅니다. 신앙의 목적도 욕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무언가를 덜어내는 데에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