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직 쓸모없는 자가 되고자 한다

심연에서(De Profundis)

by 후추

사순절은 영혼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자아의 바람을 빼고, 쪼그라들게 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의 미덕은 풍요로움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깨닫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팽팽하게 부푼 자아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민낯의 자신을 마주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때로 행위(doing)는 존재(being)의 인식을 가로막습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행위는 자기 존재를 착각하게 만듭니다. 어떤 직장에 다니는가, 조직 안에서 무슨 일을 맡았는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그런 것들은 자신을 설명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가리는 말들입니다.


매 주일, 우리는 30초간 침묵 속에서 기도합니다. 그 침묵은 자기 마음을 향해 돌아서는 향심(向心)의 시간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이런저런 분주함 속에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틈이 없었으니, 잠깐이라도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한자 '我(나 아)'는 손에 창을 쥔 형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무기를 들고 자신을 지키거나, 다가오는 것을 향해 겨누는 모습이 '나'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방어기제는 필요한 것이지만, 자아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옆 사람을 그 창끝으로 찌르고 맙니다. '심연에서'(De Profundis)로 알려진 시편 130편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시편 130:1-2, 새번역)


깊은 물, 깊은 수렁 속에서 주님을 부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요즘 저는 '쓸모없음'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내 능력과 유용성과 생산성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서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목수가 여행 중에 커다란 나무를 만났습니다. 마차 수천 대가 그늘 아래 쉴 수 있을 만큼 넓은 나무였습니다. 가지 하나하나가 작은 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굵었고, 그 기세는 산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목수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 나무 곁을 지나쳤습니다.

이에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을 따른 이래, 이처럼 아름다운 나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어째서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십니까?"


목수가 답했습니다. "저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저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빨리 썩고, 그릇을 빚으면 쉬이 깨지고, 기둥을 세우면 좀이 먹는다. 아무 데도 쓰이지 못했기 때문에, 저렇게 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무가 목수의 꿈속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너는 무엇과 비교해 나를 쓸모없다 하는가. 인간에게 유용한 나무들과 견주는 것이겠지. 그러나 배나무와 귤나무, 유자나무는 열매가 많을수록 가지가 꺾이고 찢어진다. 제 생명을 스스로 단축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 끝없이 애를 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나는 오직 쓸모없는 나무가 되려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렇게 자랄 수 있었다."


곧은 나무는 기둥으로 쓰이지만, 뒤틀리고 굽은 옹이투성이의 나무는 천수를 누립니다. 사회적 욕망이 덧씌운 말을 걷어내고 나면,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자아의 민낯이 보입니다. 사순절은 그 민낯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라보는 연습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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