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미덕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

by 후추

오늘날 우리는 '내 삶을 내가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려서부터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권장받고, 효과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이 곧 성숙의 증거로 여겨집니다. 주체성, 창의성, 생산성은 오늘날의 핵심 미덕이며, 자기계발과 시간의 효율적 배분은 현대인의 기본 소양으로 통합니다.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때때로 게으름이나 악덕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서두르지 않는 태연함, 내맡기는 자세를 오히려 미덕으로 여겨 왔습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쟁취하려는 분투보다, 힘을 빼고 내버려 두는 상태를 더 귀히 여긴 것입니다. 삶에 맞서 싸우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미덕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현대인의 귀에 낯설게 들립니다.


재침례파의 한 분파인 아미시는 문명과 기술을 거부합니다. 이들의 생활은 산업혁명 이전의 농촌을 연상케 합니다. 이동할 때는 마차를 이용하고, 말과 노새로 농사를 짓고, 농촌 생활에 어울리는 소박한 복장을 입습니다. 공동체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가급적 내연기관과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공통적입니다. 세속사회와의 분리를 삶의 방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전근대적인 모습은 종종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미시 남성들이 기르는 턱수염을 누군가 모욕감을 주려고 잘라버린 사건이 뉴스가 된 기억이 납니다. 1895년 단발령이 유교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 오늘날에도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듯해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아미시 공동체의 혜안이 부럽습니다. 끝없이 성장하라는 문명의 논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기술 사회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지만, 그들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갑니다. 범람하는 기술 상품들이 부추기는 허영심과 경쟁심을 경계하면서 말입니다.


아미시 공동체의 정신적 초석은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라 불립니다. 복종과 수용, 겸허를 뜻하는 이 단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자 타인에 대한 양보, 그리고 자기희생을 가리킵니다. 겔라센하이트는 어떤 의미에서 주체성의 내려놓음입니다. 개인적 성취, 자아실현, 타인의 인정을 향한 욕구와는 거리가 멀고,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현대적 삶의 방식과도 충돌합니다.


겔라센하이트는 우리가 잃어버린 미덕인지도 모릅니다. 지나치게 유능해진 나머지 교만해진 (1인칭 주격 대명사로서의) ‘나’는, 이 수용과 겸손의 정신을 새삼 상기하려 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고난주간에 묵상한 글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넘겨지다〉 3월 25일 화요일 / 트롤리

예수님은 제자들과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 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 13:21) 오늘, 복음서에서 이 대목을 읽었다.
그리스어로 적힌 원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꼼꼼히 살펴보면,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라고 번역하는 편이 더 나을 성 싶다. 'paradidomi'는 '넘기다, 내주다, 건네주다'라는 뜻이다. 유다가 저지른 짓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설명할 때도 대단히 중요하다.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롬 8:32)라고 적었다.
유다의 행동을 지금처럼 '팔아넘기다'로 번역하면 거룩한 신비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본문말씀은 유다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마 26:24) 라고 하신 까닭이 거기에 있다. 목숨을 좌지우지할 권세를 가진 자들의 손에 예수님이 넘겨지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거룩한 사역의 전환점이었다. 활동이 끝나고 수난이 시작되는 전환이다. 가르치고, 전하고, 치유하고, 와주길 바라는 데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다니시던 예수님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졌다. 이제 주님이 일을 행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형국이 됐다.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이 씌워지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받고, 옷 벗김을 당하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달렸다. 누군가의 행동에 끌려가는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셨다. 남의 손에 넘겨지는 시점부터, 수난은 시작됐으며 그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는 소명을 이루셨다.
예수님이 손수 하신 일이 아니라 당한 일을 통해 사명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건 내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들 그렇듯, 내 삶 또한 십중팔구 남들이 내게 하는 일에 좌우된다. 그러니 수난일 수밖에 없다. 인생의 대부분이 수난, 곧 '당하는' 일들이므로 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다. 삶에서 수난이 차지하는 비중이 행동에 비해 압도적인 게 현실이다. 이런 점을 외면하는 건 자기기만이며 사랑으로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는 행위는 자기부정이다.
예수님이 고난에 넘겨졌으며 수난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지상에 실현시키셨다는 건 반가운 뉴스다. 온전해지기를 갈구하는 세상에 전해진 복된 소식이다.
베드로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길을 좇고자 한다면 행동에서 수난으로 옮겨가셨던 예수님의 발자국도 흔쾌히 따라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요 21:18)
나 역시 '넘겨짐으로써' 소명을 이뤄야 한다.

- 헨리 나우웬,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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