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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심히 May 20. 2021

Dragon Quest XI - 지나간 시간을 찾아서

SquareEnix (2017)

- JRPG 전설  하나라지만, 드래곤퀘스트(이하 드퀘) PS4에서 난생처음 접하시는 분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기대치 조정이 필요합니다. 매번 최신 기술력에 기반해 그래픽, 시스템, 설정까지 갱신하는 파이널 판타지(이하 파판) 시리즈에 비해, 드퀘는 놀랍도록 고리타분하거든요. 고전적인 플레이감각을 현세대에 맞춰 구현한다는 집요함은 드퀘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특히나 PS1에서   작품을 내며 기기의 한계치를 시험했던 파판과, 팬들조차도 식겁했던 드퀘7 그래픽의 대비는  브랜드가 기술을 대하는 바를 명확하게 대비해 주었죠.


- 무려 초기 공개 시만 해도 오픈월드인 척을 했던 이번 드퀘11에서도, 그래서 딱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촌스러운 미디 음악을 일부러라도 넣었을 거고, 남의 집에 벌컥 들어가 항아리를 깨도 웃으며 대화해주는 기괴한 세계가 펼쳐질 테니까요. 일자 진행의 스토리텔링이 JRPG의 매력이라고는 해도, ‘상호작용’에서 드퀘11은 그 거리감을 슈퍼패미콤 시절에서 딱히 좁히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보다 가깝게 ‘체험’하며 게임 속에 동화되는 상호작용이 아닌, 소설책을 읽으며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그런 예스러움이 드퀘11에는 있습니다.


- 분명 시리즈 중에는 역대급 그래픽이지만, ‘돌아다닐 수 있다’와 ‘필드에서 적을 보고 싸움을 걸 수 있다’는 인카운터 시스템의 개선 정도를 제외하면 상호작용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맵을 훑고 다니며 아이템을 줍고, 말을 걸고 책장을 뒤지며 일직선 스토리에 살을 붙이는 정도의 고전적인 게임 디자인이 있을 따름이지요. 제작진이 펼쳐놓은 즐길거리라고 쓰고 왜인지 빼먹기 찜찜한 숙제들을 하나씩 챙기다 보면 자연스레 호흡은 늘어집니다. 이 느릿한 진행 속에서 천천히 용사와 그 동료들의 사연이 쌓여갑니다. 마냥 착하게 생긴 토리야마 아키라의 캐릭터들, 반짝반짝한 원색의 화면이 이 속도와 어우러지면, 아 이게 드퀘였지 라는 익숙한 향수에 빠지게 됩니다.


- 신디사이저와 미디음의 촌스러운 뿅뿅거림이 빠듯한 사운드는, 아무래도 애매합니다. 이것도 향수라고 하면 그런가 싶다가도.. 곡마다도 사운드 질감의 편차가 크다 보니 좋은 곡을 듣고 그 뒤에 뛰뛰 거리는 미디 사운드가 필드에서 곧바로 이어지면 마냥 이질감이 크게만 들립니다. 개인적으로 잇따른 극우 커밍아웃 때문에 스가야마 코이치의 음악에 이전처럼 공감하기 어려운 것도 있겠습니다만, 게임을 하며 가장 많이 들을 필드와 전투 시 음악을 굳이 이렇게 했어야 했나 라는 아쉬움은 꽤 큽니다.


- 주인공 일행에 죽음을 포함한 시련을 주고, 이를 다시금 극복하고 마왕을 쓰러뜨리는 엔딩까지의 왕도  걷는 스토리도 물론 좋습니다만. 이번작은 확실히  이후부터  엔딩에 이르는 파트의 전개가 훨씬 파격적이고 강렬합니다. 어렴풋이 9-10편의 연장선이겠거니 생각했던 올드 팬이라면 진엔딩에 뜻밖의 선물을 받게  거예요. 스토리 스포일러가 싫어서 굳이 헤매어가며 플레이하는  같은 미련한 플레이어들이라면, 정말 마음이  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올드 드퀘 3부작을 11 발매에 맞춰 PS4 닌텐도 3DS로도 이식했더라고요. 실로 치밀한 스케쥴링이 아닐  없습니다)


- 스토리 자체는 일자 진행에 가깝습니다만, 일반 엔딩에 다다른 후부터 진엔딩에 이르는 부분까지는 드퀘 시리즈 중에도 손에 꼽을 만큼 자유도가 높아지는 편입니다. 사실상의 2회차인 진엔딩 루트에서 그간의 떡밥들을 줍줍 하는데, 필드를 돌아다니며 얼마나 줍고 파고들거냐 에 따라 플레이타임과 감동의 크기도 각각 달라지죠.


- 전연령을 지향하는 드퀘의 방향성을 생각해본다면, 드퀘11의 스토리는 꽤 센 편입니다. (SMAP이 해체해서 이후로 드퀘 시리즈의 광고를 도맡을 것으로 보이는) 야마다 타다유키가 충격의 떼쓰기 광고를 선보였을 때만 해도 해피한 동심 용사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말이죠. 용사의 운명도 기구한 편이고, 사람도 꽤 많이 죽어나가고, 분명 스토리는 해피엔딩을 향해 가는데 주인공 일행은 등골 빠지게 고된 길을 걷습니다.


- 느릿함에 적응해야 하고, 고리타분한 시스템도 익혀야 하는 드퀘11은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있는, 예스러운 게임입니다. 일본의 국민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스토리텔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며 100시간이 넘는 플레이타임을 요구하는 그때의 감성에 충실한 작품이죠. 편의성 면에서 이런저런 노력이 있습니다만, 그 본질은 슈퍼패미콤 시절 이후 처음 게임패드를 잡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게 적응할 수 있을 정도의 ‘그때 그 시절’ 재연입니다. 그런고로, 앞에서 느리다 느리다 했지만, 상대적으로 해피하고 나이브했던 1부를 지난 다음부터는 진행 속도도 꽤 빨라지는 편입니다. 수집욕을 자극하는 각종 요소들을 파고들다 보면 드퀘 시리즈 특유의 ‘뭔가 말로 하기는 어렵지만 오랜 시간 하얗게 불태우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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