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각성

축의 시대에서 인공지능 시대 제2회

by Sun Lee

인류는 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신을 섬기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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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원시 사회에서부터 인간은 자연과 세계의 배후에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꼈고, 삶의 의미와 질서는 신에게서 온다고 믿었다.


천재지변은 신의 분노였고,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힘이었다.
개인은 질문하지 않았고,
그저 주어진 질서 속에서 살아갔다.

이러한 인간의 태도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조론의 관점에서 인간은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생기, 곧 영혼을 불어넣어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신을 의식하고, 신에 의존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다.


자연을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경외하며, 삶과 죽음 너머를 상상하는 능력은 인간 영혼 깊숙이 새겨진 흔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 사회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형성되며, 국가가 등장했다.
권력과 법, 전쟁과 계급이 생겨났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신화만으로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신은 정의롭다고 믿었지만, 현실의 권력은 불의했다.
신의 질서를 말했지만, 인간 사회는 혼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모순 앞에서 인간의 내면에서 새로운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신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는 없는가?”


이러한 변화는 기원전 5세기 전후, 놀랍게도 서로 거의 교류가 없던 여러 문명권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 살던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삶의 근원과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원전 8세기에서 2세기 사이, 인류 역사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의 공통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이 집단적으로 정신세계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를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인류 정신사의 ‘축의 시대(Axial Age)'라 불렀다.


인간의 정신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시기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직전의 시대라는 점은
결코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 동시성이 창조주의 뜻에 따라, 인류가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도록 허락된 준비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 우리는 이 관점에서 축의 시대에 나타난 동서양의 정신적 전환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에서 등장한 공자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인간에게로 돌렸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가.”

공자는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보았다.
군신, 부자, 부부, 벗과 벗 사이의 바른 질서가 인간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도덕적 삶의 결과였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인간 안에 이미 씨앗처럼 심겨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노자장자는 또 다른 길을 제시했다.
인위적인 도덕과 제도를 내려놓고 자연의 흐름, 곧 도(道)에 자신을 맡길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동양 사상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스스로를 절제하고 조율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인도에서 등장한 석가모니는 인간 삶의 출발점을 고통에서 찾았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인간은 누구도 이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고통의 원인을 외부 세계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욕망과 집착에서 찾았다.
해탈은 신의 개입이 아니라,자기 성찰과 깨달음을 통해 도달하는 해방이었다.

이는 인간 정신이 처음으로 자기 내면을 깊이 응시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서양에서는 탈레스를 시작으로
세계를 신화가 아닌 자연과 이성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환점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을 통해 철학의 중심을 우주에서 인간으로 옮겼다.

선이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묻다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eudaimonia)이라 보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이성과 덕에 따라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상태였다.


축의 시대가 남긴 공통 유산

동양과 서양, 인도와 그리스.

사유의 방식은 달랐지만 그 핵심에는 하나의 공통된 움직임이 있었다.


인간이 신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인류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 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시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위대한 질문은 던졌지만, 결정적인 해답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성과 도덕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만으로 삶의 의미와 기준을 세울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후 헬레니즘 세계와 기독교의 등장,
그리고 근대 철학으로 이어지며 더 깊고 치열한 논쟁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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