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회 작가님의 아무튼, 여름을 읽고 내가 쓰면 이렇겠지? 하며 써봅니다
면발도 중요하겠지만 콩국수는 면발보다 콩국이 열쇠다. 불린 콩을 적당히 삶아 땅콩과 깨를 넣고 믹서로 갈아내면 중면이든 소면이든 모든 면을 아우를 수 있는 대인배 콩물이 탄생한다.
꼬순 맛을 내기 위해 마지막에 뿌려지는 깨가루와 굵은 소금은 영혼에 날개를 달아주니 얼음이 살짝 녹기 시작할 때 크게 한 입 넣으면 세젤맛 따로 없다. 매년 여름이면 냉면보다 더 먼저 생각나는 콩국수는 어쩌면 어느 여름 날의 기억이 더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한참 전이었지.
대학 새내기 시절,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던 내성적인 성격에 어디를 가는 건 언제나 부담이고 누구를 만나는 건 무엇보다 어려웠던 시절, 어렵게 한 학기를 마치고 만난 여름방학에 우연히 참가한 농촌 봉사 활동은 절대 자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찾아간 김제, 서울에서만 나고 자라 농촌 구경 제대로 못한 나였기에 김제라는 곳은 미지의 땅이었다.
농활을 간다는 건 봉사라는 목적보다 엉큼한 그녀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녀는 참 가늘고 하얗고 뭐랄까, 깨끗했다. 글재주가 없어 노골적인 표현 외에 형용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지만 그 당시 나의 문학적 수준으로는 ‘맑고 하얗고 깨끗했다’ 외에는 아는 말이 없었다.
그때는 내가 미쳤었는지 건너들은 그녀의 농활 참가 소식에 덜컥 나도 간다고 했고 은근히 마음 설렜던 건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한 일주일간의 경험은 그녀와도 같이 가늘고 하얗고 깨끗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생강을 보관할 구덩이를 밑으로 파고, 내 키가 넘게 잠길 정도로 팠을 무렵엔 앞으로 파 나갔다. 땅을 2미터 정도 파 내려가면 그 더운 열기는 시원한 냉기로 바뀌고 천연 냉장고로 변신한다. 여기에 수확한 생강을 넣고 보관한다. 동기 한 녀석과 번갈아 가며 파다가 허리가 끊어질 정도가 되면 새하얀 막걸리와 함께 새참이 준비되는데 이 동네 음식을 골고루 맛볼 수 있어서 내심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선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옆에 있는 비누를 손에 넣고 돌돌 말아 잔뜩 거품을 내고 얼굴에 비비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많이 비비면 안돼. 살짝만 닦고 물로 잘 헹궈 내야지.” 매운 눈을 찡그리며 애써 떠 보니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무릎까지 올린 새하얀 다리가 보였다. 그녀다.
까칠하게 무관심한 척 내뱉은 내 대답은 ‘상관 마’. 그렇지 쿨 한 척 해야지. 여자애들처럼 ‘가르쳐줘서 고마워,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내 속마음이 맞았다.
횡 돌아서 가버리는 그녀, 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내 입을 나무랐지만 이미 늦었다. 오후가 되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저녁엔 마을 어르신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어려움을 들어주는 시간. 일이 끝나도 일이었지만, 주변에서 맴도는 그녀를 볼 수 있는 시간이라 피곤한 것도 몰랐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똑 같은 시간에 똑 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 그녀, 이번엔 다르다.
“또 왔네? 어쩐 일이야?” 라고 웃으며 인사로 건넨 나의 용기, 그래서 덕분에 그녀와 함께 새참을 먹었다.
그래 맞다. 그날 새참은 콩국수다.
그녀와 먹는 콩국수. 깨가 뿌려진 고소한 콩국수. 그녀와 함께 먹는 콩국수는 유난히 달았다. 먹어가면서도 달콤한 게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달콤했다. 혀도 내 마음을 아는지 달콤한 콩국수는 콩국을 다 마실 때면 더 달콤해졌다.
다 먹고 나서 그녀가 하는 말.
“콩국수가 달지?”
‘내 마음을 들켰구나. 내가 그렇게 달콤하게 먹은 티가 났나?’ 라고 뜨끔했다.
“전라도 지방의 콩국수엔 설탕을 넣어서 달콤해. 우리 고향은 소금을 넣어 짭짤하지 그런데 여긴 또 달콤한 맛이 있어서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
그랬다. 여기 콩국수는 원래 달콤했다.
그런데 난 정말 달콤하게 먹었다.
그녀처럼 가늘고 하얗고 맑은 콩국수를 더 달콤하게 먹었다.
그 이후로 여름만 되면 생각나는 콩국수, 물론 나는 소금을 뿌려 먹는다. 소금을 뿌려 먹을 때마다 그 달콤한 콩국수를 먹는 기분이다. 오늘은 점심으로 콩국수를 먹어야겠다.
그녀도 아직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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