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은 처음이라

D+114

by 태지인

2012년부터 2025년 사이, 총 세 번의 출산에 맞춰 남편의 출산휴가일 수도 큰 변화를 겪으며, 몸소 달라진 정책적 변화를 체감하게 되는데, 2012년 첫째 출산 당시 휴가 3일, 2015년 둘째 출산휴가 7일, 그리고 10년 후, 2025년 셋째 출산휴가는 무려 3주까지 늘어나게 된다. 뭐 국가가 출산을 장려한다고 내가 출산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토록 출산이 국가적 차원의 당면과제로 떠오른 것은 초고령 산모인 내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태아등록과 동시에 지급되는 임산부 바우처는 2015년과 비교해 무려 두 배인 100만 원이 되었고, 이음택시 탑승 가능한 포인트 50만 원으로 임신 중기 이후로는 택시만 타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출산과 동시에 첫 만남 바우처 300만 원, 3주 동안의 산후도우미 이용, 기저귀 바우처, 생후 1년 동안 지급되는 월 백만 원씩의 부모수당과 10만 원의 양육수당까지 여기에 다자녀 혜택이 더해지면서 십 년 전에는 없던 각종 출산지원금에 격세지감을 느꼈으나, 그중 가장 최고는 바로 남편의 육아휴직이었다. 출산을 애국자로 만드는 작금의 사회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셋째를 출산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남편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육아휴직을 내게 된 것이다.


정확히 산후 50일, 구도심에서 작은 동네카페를 하는 ‘아프니까 사장이다’인 내가, 출산으로 임시휴무였던 카페를 다시 오픈하게 되면서, 가뜩이나 이미 40대 중반을 지나며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남편은 본격적인 육아휴직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척해지기 시작한다.


일에 복귀하며 점점 활기를 띄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100일 이전에 아기와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게 어떤 건지 아는 나로서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맘과 달리 카페출근시간은 점점 앞당겨졌다. 갓난아기를 하루 종일 안고 있다 보면 차라리 일하는 게 휴식이었다.


손님이 가장 몰리는 점심시간을 지나 한시름 숨을 돌리고 나면, 카페 통창밖으로 아기 유모차를 끌고 올라오는 손님이 보인다. 아뿔싸, 친애하는 육아동지, 남편이다!


그래, 아내든 남편이든 주부라면 밖에 나와서 커피 마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다면! 다 안다. 하지만 남편은 인간적으로 너무 자주 나온다. 잦은 외출에 아기 허벅지가 햇빛에 타서 기저귀 경계선이 생겼을 정도다.


분유라떼 시키신 분

그러한 남편이 육아휴직 이후 스스로 정체되고, 정서적으로 고립되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을 때 너무나 깜짝 놀랐다. 그것은 대부분의 산모들이 겪는다는 산후우울증의 전단계, 산후 정서적 고립이었다. 순간 오로지 내 것이었을 우울함을 남편과 나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제철회사에서 하루종일 망치질을 할때보다 허리가 더 아프다는 남편의 고충을 듣다 보니 차라리 빨리 회사로 복귀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사실, 종전의 50%도 안 되는 육아휴직 급여로는 길게 이어나가기 현실적으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의 육아휴직이 단순 아기돌봄을 넘어서 산후 불안정한 초고령산모에게 충분한 정서적 지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함께 이 고된 전투육아에 고군분투하는 것만으로도 지난 나의 고생까지 온전히 이해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첫째, 둘째 모두 지금의 셋째만 한 간난쟁이 시절, 수개월을 밤새 홀로 수유하고, 기저귀 갈며 오롯이 내 것이라고만 믿었던 지난 긴긴 불면의 밤들을 말이다.


셋째를 출산하고 백일잔치를 하지 않은 백일이 지났다. 이제와보니 중요한 건 잔치나 기념사진이 아니었다. 아기가 5시간 이상 깨지않고 잘수있게 되기까지, 무사히 우리 부부가 잘 버티었다는 안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아닌 ‘우리’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