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건네는 급진적 제안.
하나쯤은 읽었다고 생각했던 김연수였으나 사실 첫 번째 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어디선가 서너 줄 읽고는 공감되지 않는 문장에 과감하게 책장을 덮었던 것 같다. 『쇼코의 미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최은영의 문장이 내 마음의 비밀을 더 적절할 수는 없을 비유로 담담하게 폭로하는 느낌이었다면 김연수의 문장은 아직은 모두는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실천할 수 없는 이야기, 사실은 공감하면서도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까. 나에게 이 단편들은 많은 부분이 불편했다. 실은 공감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1.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여름」은 미혼모였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들인 ‘나’가 ‘나’를 임신했을 당시에 만난 여관 종업원과 만나 어머니 이야기를 듣게 되는 단편이다. 유명 여배우였던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고 은퇴하여 의상실을 하는 고된 삶. ‘나’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나’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한 그날 밤, 그 고된 삶이 예정되었던 그날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그날, 여관 손님인 어머니의 전화를 도청한 여관 주인은, 어머니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여관 종업원에게 어머니와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하며 하루를 잘 넘기라고 지시한다. 어머니를 마시게 하려던 술을 종업원 ‘옥희’만 마시고 어려운 환경으로 꿈을 접고 살아가던 옥희는 취해서 자기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도청했다는 사실과 함께) 어머니는 잔잔하게 말한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현실에 절망하고 꿈을 잃은 옥희에게 배우의 영광이 사라질, 미혼모로서의 고단한 삶이 펼쳐질, 그래서 자살할지도 모를 만큼의 암울한 미래가 예상되었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나 자라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리라는 좋은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 좋은 기분을 잃지 말자고.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과거의 삶(어머니처럼 화려했든, 옥희처럼 암울했든)보다는 미래 누릴 좋은 생각으로 현재를 채워간다는 것.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따뜻하고도 고개 끄덕여지는 이토록 다정한 조언은 여러 단편에서도 이어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 어떻게 사는 것이 평화로운가, 어떻게 사는 것이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가’를 모두 담고 있는 질문이다.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다. 「첫여름」이 미래를 바라보는 방법을 제안했다면 ‘젖지 않고’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그리고 고통을 바라보는 법이다. 아내를 잃고 과거의 삶을 후회하는 신기철 씨는 말한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싶었던 밤들과 미래에 대해 함께 얘기하던 날들과 과분한 행운은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했고, 서로에게 한 말실수와 무례한 행동 등과 예상치 못한 불행은 다시 봐도 여전히 괴로웠습니다. 그럴 때마다 암흑에서는 바람이 불어와 저를 깨웠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입니다. 암흑은 제 감정에 따라 반짝인다는 사실을. 암흑 속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제 감정이었습니다. 보이는 대로의 삶, 표면의 삶은 제 감정 상태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야기에 젖은’ 상태라는 것은 삶의 여러 장면에서, 관계에서 휩쓸리는 감정을 말할 것이다. 바람이 불어와 마른 상태가 되면 ‘모든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해탈’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얼마나 먼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비슷하게 이해한다. 우리는 기쁘고, 슬프고 절망하고 후회하지만 정말 많은 것들이 어쩌면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아니었나. 이것은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나’도 인생의 ‘우연’을 인정한다.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결국 우리에게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우연한 일들을 내 인생으로 끌어들여 녹여낼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고 안이하게 외부의 스토리에 내 인생을 내어주고 마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연’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우연’에 젖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상태. ‘우연’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가 우리 삶을 결정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던지는 김연수의 화두이다.
2.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제안 –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것.
나를 불편하게 했던 제안 중 하나는 ‘위험한 재회’에서의 제안이다. 동맥에 있는 세 겹의 막 중 가장 안쪽의 막이 터져 화를 내지도,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는 상태의 기태는 의사로부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받는다. 대학 때 헤어진 화영을 우연히 재회하게 된 기태는 살기 위해 이제야 묻는다. ‘왜 우리가 헤어졌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화영이 기태에게 느꼈던 감정을 또한 ‘살기 위해’ 받아들인다. 마침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위험하므로’ ‘너를 잊고 산 적이 없다.’라고 말했을 때 마침내 화영은 말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라고. 그리고 이로써 기태의 생명은 연장된다.
이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라는 가르침이다. 그 끝에 기태의 생명은 연장되었다. 화영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했다면? 답은 이미 제시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옳은 이야기이다. 괴로운 일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자명한 진리임에 동의한다. 그것이 내면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나의 의도와 노력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많은 일들, 상대의 감정, 관계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단순한 진리는 그러나 결코 쉽지가 않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도 역시 그렇다. 너무나도 쉽지가 않아서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하다.
3.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의 어려움, 또는 불가능
우리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나는 이 ‘받아들이기 어려움’에 대해 참 많이 생각해 왔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먼저 이성적 차원에서 시작한다. 삶이란 원래 부조리하다는 것, 온통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 행운과 마찬가지로 불운도 얼마든지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한숨과 다짐과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안이 필요했던가. 그러나 이성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느낀 순간 더 큰 난관이 있음을 느낀다. 아무리 위로해고 스스로를 북돋아도 슬퍼지는 감정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말이다.
우리가 진정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때로 타인이나 외부적 상황이 아니다.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서 아내를 잃은 신기철은 말한다.
“...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날벌레들이 얼굴에 달라붙는데도 그게 제 몸 같지 않았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기를. 용서해주시를. 나를.” 우리는 그 용서의 대상이 죽은 아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였다고 그는 말했다. ... 중략...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그 마음을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략... 저는 여전히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거기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죽고, 과거 아내에게 충분히 위로와 사랑을 주지 못했음을 알게 된 남편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치닫던 그들의 관계로부터 용서받기 원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관계에서 자책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그 관계에 모든 책임이 있는 것 같은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많은 순간 타인보다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러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이란, 가족을 잃은, 어린 자녀를 잃은 슬픔이 아닐까.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의 서지희 씨는 경주로 가는 수학여행 버스를 타다 사고가 나 죽은 아이의 어머니이다.
“전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분노한 적이 없었어요”라고 대답했다. “모든 건 그런 저를 용서하느냐, 용서하지 못하느냐의 문제였어요.”라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 앞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 울어도 되는 곳에서 마냥 걸으며 우는 수밖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극복해낼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 아닌가.
나약한 나는 그래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북돋아보다 그 끝에 어쩔 수 없는 감정이 여전히 존재함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주는 문장에서 위안을 받는다. 세상 일은, 삶이란 것은,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 것도, 그래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라고 말하는 문장들 말이다.
4. 공동체의 책임, 그리고 문학의 역할.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는 재개발로 철거 예정인 아파트에서 베어질 운명에 처한 나무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나무를 지키고자 모인 사람들 속에서 반려견 궁금이와 이별을 겪은 아픔을 되새기는 화자가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 그곳에 새들과 곤충과 나무들은 여전함을 깨닫게 된다.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수 가 없다는 것은, ‘나 혼자만 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 진부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더불어 사는 삶’이다.
「거기 까만 부분에」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와 단지 수련회에 함께 참여했다는 이유로 편지를 남긴 ‘주희’라는 학생과 사고사를 당한 아이의 약전을 쓰는 작가, 별을 관찰하는 연구원의 이야기가 겹친다.
말하자면 카메라 쪽이 더 많은 별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한 셈이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라고 연구원은 말한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는 것, 그것이 관찰자로서의 책임감이 아닐까요.”
세상의 이토록 많은 슬픔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기분 좋은 새로운 변화가 생기리라 기대하는 것이 개인의 몫이라면 공동체는, 그리고 예술은, 그리고 문학은 어때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거기 까만 부분에」를 비롯한 여러 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범주에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반려견도, 자연도 모두 ‘우리’이다. 우리는 삶의 고난을, 그리고 슬픔을 ‘바라보는 것’,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그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 깊은 인연을 맺은 관계가 아니더라도 (주희처럼) 함께 애도하는 것. 문학은 작가의 ‘바라봄’을 독자의 ‘바라봄’으로 확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인식’이 대상을 ‘존재’하도록 만든다는 생각은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이어진다.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말입니다. 제가 소설을 쓰고 출판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조언과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라는 조언은 같은 목소리이다. 김연수가 생각하는 작가의 역할은 이런 것인가.「고작 한 뼘의 삶」에서 P씨의 잘못은 충분히 바라보지 못한 것이리라. 충분히 바라보고 받아 적는 것, 그것이 작가의 역할이라는 것.
나아가 ‘가능성의 세계’의 존재를 인식하라는 문장은 조용한 내 집에서 생각과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앉아 있고 싶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변화는 불편하다. 심지어 현실이 절망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더구나 ‘나의 일’이 아닌 세계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그래서 김연수의 제안은 무척이나 ‘급진적’인 것이다.
5. 끝나지 않는 삶을 대하는 나와, 우리와, 문학의 자세 –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아이를 임신시킨 남자가 여자를 버려도, 사고사로 아이를 잃어도, 아이 잃은 유족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가득해도 말이다. 삶은, 절망이든 행운이든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토키도키 유키」에서처럼 ‘때때로 눈’인 상태로 이어진다. 이러한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이제 우리에게 남는다.
이 단편집의 매력은 굉장히 짧은 이야기 속에 설득력 있는 작가의 목소리가 지나친 강요 없이 흐른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져 불편하기도 했고, ‘그렇지.’하고 다시 나를 붙들게 되기도 했다. 좋은 문학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좋은 교사로서 성실했는지 돌아보라는 책망처럼 들리기도 했다. 성찰하도록 만드는 힘, 그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나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수용하기 위한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가,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아직도 너무나 많은 여름이, 가슴 설렐 여름이 우리 앞에 놓여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