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우리 모두 이렇게 살고 있네요

by 쉼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중략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

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

(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한때 ‘토지’와 ‘태백산맥’도 읽었으나 이제는 활자라면 축구 기사만 보는 남편마저 순식간에 읽어낸 무척 가독성 있는 책. 특히나 대한민국을 사는 30~40대 여자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참 계산적이고(「잘 살겠습니다」의 화자, 「도움의 손길」의 화자) 상대의 몰염치에 쉽게 화를 낸다. (「잘 살겠습니다」의 빛나, 「도움의 손길」의 도우미 아주머니)


그러나 우리가 계산하는(평가하는 대상의) 그 몰염치라는 것은 너무나 잘아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의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내는 화는 오히려 거대해 보일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나 나름 공평한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또는 외부의 시선에서 점검한) 기준을(타인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적용한다. 그러므로 잘못은 ‘타인에게 부당하게 요구하거나 빚져서도 안 되고 내가 요만큼도 손해 보아서는 안 된다.’라는 기준을 어긴 대상에게 있는 것이다.(라고 화자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가 결국 파탄나 버리고 마는 이유는


각자의 계산이 다르기 때문이거나, (「도움의 손길」의 도우미 아주머니가 요구하는 ‘먹을 것’은 합당한가, 부당한가.) 드물지만 기준이 없는 자가 여전히 이 세상에도 존재(「잘 살겠습니다」의 빛나)하기 때문이다. 기준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잘 살겠습니다」의 화자가 빛나에게 보낸, ‘받은 만큼의 금액을 돌려 주기 위해 소비한 카드’에 쓴 몇 줄의 글이 감동의 메시지로 오인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모래보다 작아져 버린 것이 우리 탓은 아니다.


우리는 아메리카노 하나를 소비하는 일에도 고심을 해야 하고(「백한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여성은 남성보다 현저히 적은 연봉을 받아들여야 한다. (「잘 살겠습니다」) 업무 추진을 성공적으로 했더라도 회장의 사적 욕망을 맞추지 못하면 월급을 포인트로 받는 삶(「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김수영의 시에서처럼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만 부당함을 항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러한 삶이 자책으로 이어지거나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발랄하다.


현실의 구질구질함에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그 속에 빠져 버리지 않고 거대한 사회 속의 작은 한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 이를테면 되도록 회사에서 울지 않는 것(「일의 기쁨과 슬픔」, 일일이 계산하는 것(「잘 살겠습니다」, 「도움의 손길」), 나의 이상을 접어 두고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결심을 하는 것(「다소 낮음」, 「탐페레 공항」)은 너무나 통속적이라서 오히려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이 소설이 고마운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박수쳐 주고 싶게 만드는 마음.


김수영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


라고 하였으나 우리는 ‘작은 나’를 인식하고 세계를 바꾸려 하기보다 어쨌든 그 안에서 잘 살아보려 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으며 (「일의 기쁨과 슬픔」), 나의 꿈을 접고 세계가 요구하는 직장 생활을 해나간다. (「탐페레 공항」)


그래서 우리의 ‘일의 기쁨’은 진정한 자아 실현이나, 간절히 소망했던 꿈의 실현이 아니라 생활의 기반을 제공하는 것(급여)이며 동시에 '일의 기쁨'이 그 ‘생활의 기반 제공’뿐이라서 일은 ‘슬픔’이기도 하다.


세계에 적응해 산다는 것, 이것은 자아의 진정한 요구를 포기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의 슬픔’을 모른 척 한다 한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탐페레 공항」이 소설 중에서 가장 진지한 말투로 이러한 정서를 내비치는데, 사실 꿈이나 이상을 접어 두고 사는 것은 그렇게 무거운 것은 아닐지라도 그렇게 가볍지만도 않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으로 배치한 것이 무척 적절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 그러나 이 소설은 발랄하다. 세계를 세계대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씩씩하게 또 세계에 적응한다. 조금이라도 잘 살아 보려고 일일이 계산도 해 가면서.



그러므로 세계에 자신을 맞추며 나름의 합리적 기준으로, 사회적 센스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고 있네요,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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