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살아냈어야,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by 쉼표

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신경숙 작가의 힘은 무엇일까.


우리 학교에서 신경숙 작가님의 ‘작별 곁에서’를 읽고 북 콘서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작별 곁에서’를 읽고 출간되었는지도 몰랐던 ‘아버지에게 갔었어’까지 찾아 읽었다. 나에게는 ‘작별 곁에서’보다 ‘아버지에게 갔었어’가 훨씬 마음에 남았다. 신경숙 작가의 책이 마음에 남는다는 것은 소설 속의 장면과 장면 속의 감정이 내 마음의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불려진 기억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다시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있을 것 같은 느낌. 감동받은 책도 잘 잊어버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가물가물한 나에게 ‘외딴방’은 그래서 어떤 면에선 신기하게 느껴진다.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 그리고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그런 면에서 나에게 비슷하다.


내가 왜 이 작가에게 슬픔, 동경, 애틋함.... 과 같은 감정을 동시에 느낄까? 자전적 소설 ‘외딴방’과 ‘아버지에게 갔었어’의 화자가 신경숙 작가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화자의 목소리, 그리고 성격마저도 온전히 작가의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는 모양이다.


비슷한 장면의 아버지와 살아내는 일에 대하여.


'아버지에게'의 '아버지'와 현실 속의 내 아버지, 또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

‘아버지에게 갔었어’의 화자 '나'는 작중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나와 무척 다르다. ‘아버지에게’의 화자 ‘나’는 나보다 훨씬 다정하고, 부드러우며, 조용하고, 깊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족과의 관계에서 나는 냉담하고, 관용하지 못하며, 복합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버지를 대하는 나를 만드는 현실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에게’의 ‘아버지’는 인격적으로 거의 완벽해 보인다. 이 소설을 읽으며 줄곧 화자 ‘나’가 부러워진 것은 그것 때문이다. ‘아버지’를 모순된 감정 없이 떠올릴 수 있는 관계란 어떨까. 나에게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볼 때와는 다르게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사랑과 상처, 분노와 실망, 걱정과 외면... 동시에 너무나 많은 기억과 감정이 뒤엉킨다. 그러니 ‘아버지에게’에서 이러한 모순된 감정에 대한 답을 찾기를 원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가 있고 그만큼의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존재한다. 사실 나는 ‘아버지에게 갔었어’에서 자녀와 아버지 사이의 대표성을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나? 이런 아버지는 너무나 특별한 것 아닌가? 하고 자꾸 딴지거는 마음이 생겼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아버지, 많은 아버지로부터 만들어지는 많은 관계성을 떠올린다면 ‘세상에 있는 또 하나의 아버지’로서 이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히 세상에 ‘이런 아버지’도 있을테니 말이다.


우리가 아버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아버지로서의아버지


자녀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로 기억한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녀인 ‘나’와 관계 없이 살아온 삶을 아무리 마음으로 존중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엄마로서의 엄마’,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어린 자녀 사이의 작은 기억들은 그래서 참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자꾸 눈물이 솟게 만들었다.


한편,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로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를 기억한다고 말했지만 나이가 들며 우리는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를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지 않는가? 어린 시절엔 그저 나에게 보이는 한 장면, 장면에서의 아버지만을 보고 나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을 보고 기꺼이 사랑하고 수용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기꺼이’ 수용하게 되지가 않았다. 이제 모든 장면에 나의 ‘판단’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한 장면에서 남은 감정이 그 다음 장면까지 이어져서 이제 한 장면과 다른 장면 사이에 모순이 있는 아버지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아버지라면, 그래 장면 장면에서의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게’의 ‘아버지’가 실제 나의 아버지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린 시절의 장면, 그 속의 아버지는 마치 내가 겪은 듯이 뭉클해지는 것이다.


....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버스는 출발해버렸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버스가 출발한 후 아버지는 그 자리에 얼마나 더 서 있었을지를. 나를 태운 버스가 사라진 후의 어두운 신작로를 아버지는 무슨 마음으로 내다보았을지를. 아버지가 얼마 후에나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지를..
- '너, 본 지 오래다', p17


어린 나이에 일을 하기 위해 J시에서 서울로 떠나며 아버지와 작별하는 장면이다. 버스가 출발할까봐 가게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황급히 인사를 하고, 뒤늦게 딸을 쫓아 나오신 아버지는 버스를 보며 서 계신다. 이 장면에서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를 저 정류장에 세워본다. 아직 어린 딸을 떠나보내는 마음. 아직 어린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는 안쓰러운 마음과 충분히 뒷바라지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내 마음 속에도 어쩔 수 없이 자리잡은 가부장적 관념 때문일까. 돈이 없고 힘이 없어 가족 구성원의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을 때, 움츠러든 어깨와 힘없는 발걸음, 푹 숙인 고개의 주인공은 아버지일 것 같다. 작아져버린 아버지.

위 구절과 같은 장면이 나에게 남는 이유는 그러한 상황과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 그리고 아버지가 화자 ‘나’를 떠올리는 마음, 그리고 화자 ‘나’를 떠올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는 마음. 그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화자가 안타깝게 이별한 상황 그 자체도 슬프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화자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슬픈 마음과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슬프게 생각하는 화자의 마음이 감동적인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말없이 헤아리는 관계.

아버지와 나, 서로의 마음을 말없이 헤아리는 관계


셋째 오빠가 후기 시험을 보러 가던 날 일찍 일어나 오빠가 타고 갈 버스가 도착할 신작로로 이어지는 고샅까지 눈을 쓸어 두는 아버지, 도통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내가 자전거를 익히게 하기 위해 다리 위를 스무번도 넘게 뛰며 가르쳐 주는 아버지. 이런 작은 이야기들은 무척 따뜻한 이야기임에도 자꾸만 눈물이 나게 만든다. 이런 시절이 한때 나에게도 있었고, 이제 모두 지나가 버렸기 때문일까.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 오는 감동은 소설 곳곳에 있다. 둘째 오빠가 간첩으로 몰렸을 때의 장면이다.(둘째 오빠가 쓴 편지로 화자는 둘째 오빠이다.)


.... 나중에 아버지가 담양경찰서로 나를 데리러 왔다
....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음이 어질고 착해서 지 어머니가 힘들어 보이니까 여동생을 업어 기른 아이이며 형과 동생 틈에서 지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늘 양보하며 눌려 지내는 놈인데 무슨 간첩이냐. 등록금 걱정에 학비가 덜 드는 해양대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마음에 구멍이 나서 자전거 여행에 나섰을 뿐인디 무슨 간첩이냐, 고 조목조목 말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깜짝 놀랐어.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거든. 내가 해양대학교에 지원한 이유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둘째의 마음까지도.
- ‘그에 대해서 말하기’, p263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버지의 마음도 뭉클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는 둘째 아들의 마음도 찡하다. 서로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아버지가 아이를 아이가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버지를 다시 아버지가 어머니를. 서로가 서로를 안쓰러이 여기지만 말하지 않는 관계.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닌 시절의 삶과...


‘관계’를 제외한 ‘아버지’를 보는 일도 내 마음에 깊이 기억될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몇일 사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는다. 어린 아버지는 누나와 여동생과 집에 남겨지고 열네 살 아버지에게 주어진 것은 송아지 한 마리.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은가. 겨우 열네 살,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송아지 한 마리로 이 넓은 세상에서 긴 세월을 살아내라니. 열네 살이라는 나이는, 내가 만나는 열네 살의 나이는 가방을 메고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하다가 친구와 다투고 선생님께 혼나기도 하며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잊어버리고 작은 일에도 칭찬받고 많은 실수에도 용서받는 그런 나이이다.


6. 25전쟁, 국군과 인민군 사이, 징병의 위협 속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아버지. 한때 철도원을 꿈꿨으나 전쟁으로 좌절되고 함께 공부했던 이를 후에 구하지 못했음을 평생 가슴에 껴안고 살았던 아버지. 서울에 터전을 잡아보려 농한기에는 대책 없이 서울로 가서 생활비를 마련해 오던 아버지. 그럼에도 여섯 자녀을 풍족하게 키우지 못했음을 미안하게 여기는 아버지. 그것이 어떻게 잘못이겠는가. 자녀들을 풍족하게 키우지 못하는 것이 어찌 아버지의 책임이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실은 이 ‘아버지에게’의 ‘아버지’가 평균적으로 보더라도 한참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인격적으로도, 또 희생의 측면에서도 말이다. 그것은 감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다. ‘아버지에게’의 ‘아버지’가 공감의 대상이 되기엔 먼, 그래서 그런 아버지를 가진 화자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아버지에게’의 ‘아버지’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일생을 헌신하였으나 경제적 능력이 크다 말 할 수 없고(시대나 상황을 제외하고 그저 현실 그 자체로만 보자면), 너무나 가까웠던 이를 배신한 순간도 있었으며(물론 누구나 이해할 만한 배신의 순간이었으나) 사실 가정을 져버릴 결심을 한 외도를 한 사람(그 외도의 결심이 순간이었으며 가정을 져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자명하다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이기도 하다.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특히 ‘공부를 한 사람’, 갈치 조림 집의 딸 ‘김순옥’의 존재는 개인마다 평가가 많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순옥’은 ‘아버지에게’의 ‘아버지’가 가족이라는 관계를 제외한, 오로지 한 개인으로서의 감정, 소망, 꿈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인 것일까. 가족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던 아버지가 이 가족을 순간이나마 배신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되새기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김순옥’을 통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의 오래된 꿈을 위해 몇 년쯤 집을 떠나버렸다면 오히려 이해가 됐을 터이다. 어머니에 대한 배신을 제외하더라도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다? 순옥과의 사랑을 위해 가정과의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 있던 아버지가 순수하게 이기적인 마음을 품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떠나버렸다면 박수를 쳤을 것 같다. 작가는 김순옥을 통해 아래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는 어느날의 바람 소리, 어느날의 전쟁, 어느날의 날아가는 새, 어느날의 폭설, 어느날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 로 겨우 메워져 덩어리진 익명의 존재. 아버지 내면에 억눌려 있는 표현되지 못하고 문드러져 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
- '계속해서 밤을 걸어갈 때', p76


그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몫이리라.


아버지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소설 속 ‘아버지’는 이제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렇다면 자녀들에게 남은 것은? 큰 오빠는 자녀에게 남은 말년의 부모를 보는 감정을 이야기한다.


...병들고 늙은 아버지와 은퇴를 앞두고 있던 내가 나란히 앉아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탄 기분은 참으로 묘하더군. 아버지를 부축하여 기차 안의 화장실을 다녀올 때 물을 편안히 마시게 해드리기 위해 물병에 빨대를 꽂아 물병을 기울일 때 순간순간 외로웠어. ....J시에 올 때마다 나의 뿌리를 실감하지. 역전 시장통에서 콩 한됫박을 앞에 놓고 파는 할머니를 보면 아직도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 욕망이 누그러지지. ....나는 갑현과 오랜 친구로 지냈지. 갑현은 부모 말을 대신하느라 그랬는지 평소엔 거의 말을 안 했지. 나는 새나가면 안 되겠다 싶은 말을 갑현과 나누곤 했지. 그 친구는 청년이 되었을 때 부모를 모시고 뉴질랜드로 갔어. 왜 하필 뉴질랜드로 가느냐 물으니 거기 자연이 부모님과 맞을 것 같아서, 라고 했네. 오로지 그게 그 친구가 뉴질랜드로 떠난 이유였어. 어젯밤에 들판을 걷다가 여기 사는 동안 그 친구가 단 한번도 얼굴을 찡그린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냈지. 어젯밤은 그 기억을 붙잡고 나를 다독였네. 이제 부모의 보호자가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 나이 아닌가.
-'모든 것이 끝난 그 자리에서도', p387~p392

말년의 부모를 보는 심경은, 떠올리기만 해도 복잡해서 떠올리는 그 감정마저도 외면하고 싶어진다. 부모의 보호자가 되는 일에 대한 감정을 ‘두려움’이라는 큰오빠의 고백과 다짐. 말년의 부모의 모습은 인간이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직면할 때 순간순간 외로워질 것이다. 동시에 어렸던 나, 왕성하게 활동하던 나를 내려야 하는 시점이 함께 왔음을 느꼈을 때 이제는 그만 내려놔야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기에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는 부모와 동행해야 할 것이다. 슬프기도 힘들기도 할 때엔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일이 나에게도 일어나는 것임을 다시 되새기면서.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인가 보다. 누구에게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내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와는 관계없이 주어지는 일이 있는 것일까. 딸을 잃은 작중 화자 ‘나’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J시의 할머니들이 ‘나’에게 건네는 이 말은 가슴이 아프면서도 위로가 된다.


오래 슬퍼하지는 말어라잉.
우리도 여태 헤맸고나.
모두들 각자 그르케 헤매다가 가는 것이 이 세상잉게.
-'모든 것이 끝난 그 자리에서도', p404


그리고 아버지가 ‘나’에게 미리 해두는 유언,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살아냈어야, 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 라고.
-'모든 것이 끝난 그 자리에서도', p416


이제 대부분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는 세상은 지났다. 모두가 이와 같은 어머니나 아버지를 가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은 ‘그렇지.’하게 되지 않은가. 모순덩어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내 아버지에게도 자식이라는 존재는 ‘용케도 덕분에 살아내’게 하는 존재이지 않았을까. 어깨의 무거운 짐이면서 동시에 이 삶을 포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자식이라는 끈. 특히나 ‘아버지에게’의 아버지 세대라면 정말 어떻게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용케도’ 살아냈다는 말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자녀가 없어도, 심지어 부모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낸다. 때로는 너무나 힘들어 ‘용케도’ 살아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매고 가는 삶을 기어이 살아내는 것인가. 거기에 ‘너희’가 있다. 나에게 ‘너희’는 나의 두 아이이다. 누군가에게 ‘너희’는 음악, 친구, 하루하루의 즐거운 만남, 혼자만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살아내고 있고, 대체로 우리는 헤매고 있으므로 ‘아버지에게’의 이야기에 독자들은 감사하게 될 것이다. 작품 속의 ‘아버지’와 ‘아들’과 ‘딸’의 삶이 위안이 되어 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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