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김소월

- 진달래꽃을 읽는 사적인 방법

by 쉼표
1. 지극히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당신이 이 시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방법.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진달래꽃을 남녀 관계로 한정한다면 지극히 이성을 사랑해 본 경험이 없는 누군가에게 이 작품은 중고등학교 때 공부해야 할 필수 작품으로서 왜 그렇게까지 좋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싱거운 시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달래 꽃을 따다(2연) 나를 버리고 떠나는 임 가는 앞길에 급기야 축복까지 하는(3연)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이나 또는 ‘그래 나(=꽃)를 버리고 한 번 가 보아라’는 섬뜩하기까지 한 한 많은 여인의 모습을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다짐 옆에 ‘반어법’이라고 필기까지 마치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솔직하지 못한 사람, 자존심이 강한 사람, 끝까지 독한 사람이라는 인상마저 갖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이성에게 ‘지극한’ 사랑의 감정을 가져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 시를 ‘공부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시적 화자의 마음을 이해할 가능성은 무척 낮아질 것이다. 또, 시적 화자와 정서적인 결이 다르다면 감동의 깊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러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는 마음의 정체는,

나는 시적 화자를 ‘역겨워’ 떠나려는 대상에 내 아이들을 두어보았다. 그리고 의외로(?) 깊이 사랑하는 나의 남편도 두어보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연애만 한 남자친구를 지극히 사랑하기란 어렵다.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보다 사랑한다는 뜻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아직 그가 나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이별’이 아니라 ‘이별을 가정’ 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2 연부터 이어지는 이별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 진술은 ‘이별’이 임박해 왔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봐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시’는 상황이 아닌가.


함께 사랑하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은 무언가로 인해 하는 이별과 ‘나 보기가 역겨워’ 맞게 되는 이별에서의 감정이 같을 리는 없다. 그러나 화자는 말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겠다고. 이 구절은, 나는 이 시 전체가 그렇다고 여기지만, 조금도 꼬아 들을 필요가 없다.


- 내가 사랑하는 네가, 심지어 내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져서, 오히려 내가 없어야 네가 행복해진다며 떠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게, 가고 싶다면 그래, 떠나가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이제는 내가 싫어져서 떠난다고 한다면 어쩌면 나는 당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돌이킬 수 없음을 아는 나이이니까, 그래 당신이라도 행복하라고 그저 고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마음.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운한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이란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나의 이 아픈 마음을 당신과 나눠 갖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그저 행복하세요.라는 마음.


나를 역겨워하는 당신에게 꽃을 뿌리는 마음은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한때는 끔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장면임을 고백한다. 이 시를 가르치며 젊은 시절, 아이들에게 나는 내 감정을 어떤 식으로 전달했을까. 끔찍하다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가볍게 전달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떠난다면, 더군다나 내가 역겨워 떠난다면 원망과 서운함이 없지 않을 텐데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가는 앞길에 꽃을 뿌린다는 말인가? 그것은 위선인가? 아니면 객관적 상관물인 ‘꽃’을 밟으며 가라는 이 구절은, 나를 버린 죄책감을 느껴보라는 복수심을 은밀히 드러낸 것인가? 더군다나 ‘사뿐히 즈려밟고’는 역설법으로서 ‘사뿐히’와 ‘즈려밟고’는 불가능한 것 아닌가. 사뿐히(가볍게) 그러나 즈려밟고(꾹 눌러서, 짓밟고) 가라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오늘 읽은 논문에서 ‘즈려밟고’는 방언으로 가볍게 밟는다는 의미가 있다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역설인지 아닌지는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다.)

그리고 오늘 문득 다시 이 시를 ‘그냥’ 읽어 보니 또 다른 화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고받음으로 계산한다면 절대 다가갈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마음.


이 장면을 복수나 원망, 위선, 심지어 모순된 감정으로 읽지 않기 위해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별 감흥도 없었던 김소월의 시가 오늘 문득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나이가 들어가며 감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거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조건과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별은 거부할 수 없는 것,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이때 고작 하나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서운해도, 원망스러워도, 분노가 차올라도 우리가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안타깝게도 없다. 그런 인식 위에서 아직 사랑하는 이를 보낼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이 있는가. 그저 나로 인해 당신이 행복했기를 바란다고, 내가 당신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있다면 거기까지가 내 몫임을 받아들이겠다고.

그것은 결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적극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을 보내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지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그래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를 굳이 반어법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반어법으로도 가르칠 것이다. 반어로 해석한다고 해도 공감할 만한 감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에도 상대에 대한 서운함은 배제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죽어도’라고 다소 과격한 언어로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때로 상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지 않는가. 상대가 준 상처를 다 내보이지 않고 나의 희생을 숨기기도 하면서 나의 감정보다 상대의 감정을 살피는 마음. ) 당신이 가는 앞길에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에는 원망이나 복수심, 거짓을 빼고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감정이 담겨 있다.

오늘은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힌다. 이 마지막 연이 상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 되뇌는 독백이라면,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구절은 임과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 슬픔, 미련에도 불구하고 ‘그저 받아들이겠다, 살아내겠다.’라는 다짐. 그러니까 굉장히 상처 입은 한 사람이 있고 그는 이 모든 상황을 껴안고 상대에게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 그리고 아무리 슬퍼도 살아내겠다. 앙다문 입술, 꼭 쥔 작은 두 주먹에 눈물이 그렁한 얼굴이 떠올려진다면 나 자신을 너무 이입해 버린 걸까?


2. 화자의 태도가 숙명적이라고 여겨지도록 만드는 작가의 삶과 시대


작가 김소월은 1902년에 태어나 1934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린 김정식(김소월의 본명)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가 김소월이 태어나고 2년, 그러니까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만난 일본인들에게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을 때, 그래서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광산을 운영하던 할아버지 댁으로 가야 했을 때, 원하지 않는 여인과 14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해야 했을 때, 이후 사랑하게 된 여인을 떠나보내고 결국 그 여인이 남편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 때의 심경을, 기울어가는 가세에도 가문의 재산의 큰 부분을 지원받아 유학길에 올랐을 때의 무거웠을 가슴을, 관동대지진으로 촉발된 조선인 학살로 학업을 접고 돌아왔을 때의 심경을. 나는 김소월이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다는 글을 읽고 그와 더불어 그의 시가 좋아졌다. 일본에서 그렇게 돌아오고 괴로워했던 그의 마음과 광산경영을 하시는 할아버지를 돕기로 한 결심, 그러나 결국 실패한 경험. ‘동아일보’ 신문사마저 문을 닫게 되었을 때의 좌절.


그의 인생은 온통 좌절과 좌절, 실패와 실패, 그럼에도 살아내기 위한 묵묵한 걸음과 걸음의 연속이었다. 그의 좌절과 실패는 개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일본인에게

타를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아버지부터 관동대지진, 신문사. 이 모든 것들을 한 사람이 어떻게 대결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그 시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냈을 것인가.


우리는 김소월의 삶을 생각할 때 일제강점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고 결국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한 시대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진달래꽃의 화자가 왜 떠나려는 대상을 붙잡지 않는지,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안간힘을 쓰며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결국 임은 떠날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이것을 체념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인식,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수용이다.),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인생을 대하는 인내의 자세. 김소월의 삶 없이도 ‘진달래꽃’은 아프지만 시인의 삶과 당시 우리 민족의 삶을 얹으면 더 숙연해진다.


'진달래꽃'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귀함


올해 ‘진달래꽃’은 다른 의미로 다시 음미해보고 싶다. 우리는 생활인으로서의 김정식에게, 또 시인 김소월에게 왜 불의(일제)와 적극적으로 싸워보지 못했냐고, 그것이 이 나약한 시의 한계라고 따질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림으로써 그 시대, 이 땅의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이토록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한발 먼저 배신함으로써 부당한 복을 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를 읽도록 해야 했다. 사랑을 떠나보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꽃을 뿌리는 행위의 고귀함을 그들은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으리라.


'진달래꽃'을 읽는 방법은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바꿔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화자를 나약한 여인으로 그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우리를 무너지게 만들 수 있으나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 있고 어떤 시대에 또는 어떤 사람에게(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에겐 더욱)는 잔인하리만큼 더 많을 수도 있다. ('리틀라이프'의 주인공이 단지 죽지 않기 위해 견디는 고통을 지켜보다 보면, 그러다 결국 죽어도 너무나 애썼다고 너무나 열심히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지 않은가. 결국 자살해 버리더라도 살기 위해 노력한 그 많은 날들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다.)


그럼에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무수한 인생들, 결국 눈물을 흘릴지라도 다잡고 다잡는 그 마음, 한걸음 한걸음 묵묵히 옮기는 발걸음.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달래꽃'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평범한 이 사람들의 용기는 눈물 나도록 고귀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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