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2)

양심, 인간, 역사, 문학

by 쉼표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므로 어떻게 1980년 5월, 광주의 그 많은 사람들이 목숨과 맞바꿀 용기를 낼 수 있었는가, 가 의문이었다. 이 의문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작가는 5월 광주에서 극도의 참혹함과 존엄을 보았다.

16살의 정대가 혼이 되어 되뇌는 이 문장에서 우리는 극도의 폭력을 목격한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새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 높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여린 16살 소년, 정대가 있고 그 여린 몸뚱이를 관통한 총알이 있다. 그 총알의 감각을 ‘차디찬 몽둥이’, ‘휘젓는 불덩어리’로 묘사하고 반대편 옆구리의 구멍까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따뜻한’ 감각까지 불러와 이야기한 후, 방아쇠의 ‘차디찬’ 촉감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여리고 따뜻한 생명과 그것을 한순간 파괴하고 꺼버리는 차디찬 폭력. 그러나 그 폭력을 저지른 사람의 손가락도 피가 흐르는 따뜻한 사람의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소년을 죽인 그 눈을 너머 그 죽음을 명령한 학살자(그 학살자가 전두환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까지 우리는 떠올려야 한다.


이러한 폭력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의 마음은 들끓는 분노로 가득 찼던 것일까? 그래서 두려움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인가?


은숙은 후에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킨 ‘너(동호)’를 이렇게 회상한다.


... 다만 너를 기억했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도 없다. 다만, 두려움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성을 묘사하는 문장은 가슴을 한없이 내려앉게 함과 동시에 ‘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지 묻게 만든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작가는 ‘양심’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양심’이라니.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시민군은 위와 같이 말한다. 그리고 소년(동호)은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친구 정대가 눈 앞에서 총을 맞고, 총맞아 쓰러진 시신을 수습하려다가 또 총에 맞는 다른 시민들을 목격한 동호는 정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까지 도청에 남는다. 그 죄책감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그것은 ‘양심’이다. 그 ‘양심’은 두려움에 맞설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한없이 탓하도록 만든다.


다시, ‘그렇지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심’이라니. 겨우 열여섯 소년이 자신의 친구가 시신을 목숨 걸고 수습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자신을 탓하도록 하는 것이 양심이란 말인가. 목숨 걸고 저항하던 많은 광주 시민이 희생된 것을 목격하고도, 남아 있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자리에 남아 있도록 만드는 것이 양심인가. 인간에게 그러한 양심이 있는가.


선주의 이야기 ‘밤의 눈동자’에서는 선주가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해왔던 선택에 대해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쪽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라고 말한다.


나는 얼마만큼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얼마만큼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양심과 존엄


우리는 친절하고 선할 수 있다. ‘내가 피해받지 않는 선’에서 나는 친절할 수 있다. 때로는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도 친절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많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선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지는 본능적인 욕구(먹고, 자고,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를 모두 포기하고도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가. 그들이 이것을 버리고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엄’이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다가오는 학살과 고문과 강제진압을 힘을 다해 응시하는 사람들, 그들은 모든 인간적 욕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양심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양심을 버리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종이 보여 줄 수 있는 ‘존엄’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압도적인 폭력’에 서 있었던 것도 인간이다.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했다더군요. (…)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총을 쏠 수 없었던 많은 시민군들과 그들에게 특별히 더 잔인했던 군인들.

항복하며 내려오는 어린 시민군들을 내려오는 그 자리에서 총살했던 군인이 있었고 눈 앞에서 친구를 잃은 ‘너’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항복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동호에게 말했던 진수는 ‘너’의 사진을 품고 결국 자살한다. 5.18로 고문받고 풀려난 사람들의 자살률은 인간의 존엄은 착각이며 너는 육체적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들(학살자)이 옳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양심의 힘은 결국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결국 패배하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인간의 보편성은 ‘양심’이 아니라 ‘폭력’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또 한편의 사람들 - 시민군들은 총을 나누어 가지고 도청에서 군인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은 총을 쏘지 못한다.-은 이러하다.


계단을 올라온 군이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사람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지 모른다. 한 편의 사람과 또 한 편의 사람이 있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하나의 사람이 있고 하나하나의 양심이 있다. 그리고 나는 압도적인 폭력과 그 폭력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이 선 각각의 위치가 어떠할지 상상한다. 나는 어디쯤 서 있나. 우리는 때로 양쪽을 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순간은 머뭇거리고 있는지도. 그러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는가.


‘고작’ 나 하나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부수고, 밀어붙이고, 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이 세상에 있다. 또 한 편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두려움과 인간의 본능을 떨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 가지고 있는 ‘나’를 위험 속에 두고 인간의 존엄을 보여주는 사람이 또한 분명히 이 세상에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그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같은 것은 아니다. 또 누구에게나 ‘양심의 고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양심’은 인간이라는 ‘종’에게 부여된 어떤 것이지만 너무나 다르게 주어져 있다.


작가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12.3 사건에서 보여준 사람들의 모습(달려나온 시민들, 멈칫거린 군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또 한편 생각한다. 그 ‘과거’와 ‘죽은 자’는 '현재'와 '산 자'뿐 아니라 ‘양심’을 돕고 살리게 하지 않았는가. ‘양심’은 부여되기도 하지만 또 마음 속에서 키워나갈 수 있는 것 커지고 작아지며 마치 생명처럼 움직이는 것.


그런 점에서 ‘소년이 온다’는 ‘현재를, 산 자를, 그리고 양심'을 살리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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