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이 하나로도 살던 나의 가전 구입 일기
요즘 건조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를 3대 이모님이라고 부른단다. 과거 3대 필수가전이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이었다면 요즘은 이 세 이모님이라고. 물론 신 3종이 나왔다고 해서 구 3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엄밀히는 6대 필수가전이 된 셈이다. 삶은 점점 편리해지고 필요한 것도 점점 많아진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 나의 삶도 같은 노선을 밟아가고 있다. 다만 조금 느리게.
나는 오랫동안 가난한 자취생의 자아로 살아왔기 때문에 3대 이모 구입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구 3대 가전도 다 남의 것(옵션)인데 이모님은 무슨 이모님? 돈도 공간도 없거니와 혼자 살 때는 음식을 안 해 먹어서 살림도 이모 손씩이나 필요할 만큼 어렵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짐이 많은 것 자체가 싫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그 비슷한 걸 추구해왔던 터라 집에는 청소기조차 없었고 돌돌이와 물티슈만으로 모든 걸 해결해 왔다.
다만, 해가 갈수록 비염과 아토피가 심해지는 탓에 몇 년 전 고민하다 가습기만 하나 구입했다. 겨울이면 늘 건조해서 고생이었는데 가습기를 틀고 자니 확실히 아침에 컨디션이 좋았다. 소소하지만 만족스러운 나의 첫 가전이었다.
그러다 두 번째 가전을 들이게 된 것은 뜻밖의 천재지변 때문이었다. 22년에 날벼락같은 폭우로 살던 건물이 침수됐다. 1층이었던 우리 집은 괜찮았지만 반지하 층이 잠겼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살았구나 안도했는데 웬걸, 그 뒤로 벽지에 스멀스멀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방마다 까맣게 핀 곰팡이는 생각보다도 흉물스럽고 징그러웠다. 그걸 지우겠다고 별짓을 다 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한 번 뿌리내린 곰팡이는 락스로도 지워지지 않았고 빨래라도 널어놓는 날에는 오히려 시꺼멓게 영역을 키워갔다. 결국 집주인에게 말해서 부분 도배를 한 다음 재발 방지를 위해 제습기를 샀다. 외출 내내 틀어놓고 다니니 곰팡이는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
가습기와 달리 제습기는 꽤 비싼 데다 덩치가 커서 정말 내키지 않은 가전이었는데 막상 써보니 곰팡이 제거 외에도 좋은 점이 많았다. 빨래가 엄청나게 빨리 말랐고 장마철에도 집안이 보송보송했다. 이게 바로 문명의 이기구나 싶었다. 다만 조금 현타가 오는 때도 있었는데, 쫌만 건조하면 가습기를 틀고 쫌만 습하면 제습기를 트는 내 모습이 뭐랄까 좀 우스웠다. 어쩌자고 이렇게 나약한 건가. 그 전에는 아무렇게나 잘만 살다가 가습기 제습기를 산 후로 온실 속 화초가 다 되어서 유난을 떨었다.
그러고 얼마 후에는 비로소 3대 이모님 중 하나라는 건조기를 들이게 되었다. 주위 사람에게 좋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도 살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 남자친구가 사겠대서였다. 남이 사주겠다는 걸 마다할 정도로 신념 있는 미니멀리스트는 아니었어서 냉큼 그러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제습기도 있는데 건조기까진 필요 없지 않나 했는데, 건조기를 한 번 써보자마자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아, 이거네. 이게 문명이로군? 가습기 제습기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 몸에 확 체감되는 편리함이었다. 오늘 빤 빨래를 바로 입을 수 있고, 번잡스럽게 방에 빨래건조대를 펼쳐놓지 않아도 되는 데다 옷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뽀송뽀송했다. 가히 삶의 질을 운운할 만한 혁신이었다. 줄어들어 못 입게 된 옷 몇 벌 정도는 눈감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미니멀을 운운하는 자취생 자아는 조금 작아지고 나약한 온실 속 화초 자아의 몸집이 커졌다. 이번 이사를 하며 집들이 선물로 슬쩍 음식물처리기를 골랐고, 무선청소기를 사자는 남자친구의 말에 고민하다 그러라 했다. 머리 말리는 게 힘들다 하니 다이슨 슈퍼소닉 어쩌고 하는 몇 십만 원짜리 헤어 드라이기를 사자고 해서 미쳤냐고 하다가 또 그래라, 했다. 최근에는 이사를 앞둔 지인이 쓰던 식기세척기를 준대서 넙죽 받기로 했다. 가난한 미니멀리즘 자취생에서 점점 MZ 가전마니아 맥시멀리스트 같은 게 되어간다. 아직 로봇청소기는 사지 않았지만 이 기세면 언젠가 사지 싶다.
삶이 부쩍 편리해졌지만 이쯤에서 또 한 번 현타가 오는 부분이 있는데, 아직까지 기술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척척 모든 일을 해결해 줄 것 같던 이모님들은 아직 어리광쟁이인 면이 있어서 은근히 손이 간다. 가습기는 매번 말리고 닦아줘야 되고 건조기는 필터를 청소해줘야 한다. 알아서 먼지통도 스스로 비우는 무선청소기는 배터리도 짧고 먼지통을 비우는 먼지통을 언젠가는 내가 비워줘야 한다. 다이슨 슈퍼소닉 어쩌고는 머리는 빨리 마르지만 무겁다. 식기세척기는 아직 써보진 않았지만 내부 청소가 귀찮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언젠가는 이 이모들 뒤치다꺼리마저 다 해결해 주는 기술의 특이점이 올까? 애매한 채로 개수만 늘어나서 9대 이모님, 12대 이모님 같은 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다. 아니면 이 정도의 노동마저 덜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이 너무 간사하고 나약한 것인지도.... 3대 이모님이 완성되는 날 다시 고찰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