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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르티잔 May 28. 2024

돈 벌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미역장시가 된 이유

구례 오일장에서 진도산 다시마와 미역을 파는 장꾼시인 장진희

구례장터에서 그녀를 본 적이 몇 번 있다.

구례 축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미역과 다시마를 팔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이유는 진도산만 판다는 것 때문이었다.

미역이나 다시마라면 다른 곳도 많을 것인데 왜 진도산만 파는 것일까?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구례 축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해산물을 판다 / 사진 김인호]

  

어느 봄날 점심시간에 장터를 갔는데 그녀는 작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졸렸던 것일까?  

3월의 햇살이 유독 따뜻해서였을까?

햇빛이 유독 잘 비치는 곳이라 그런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묻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장진희이였다.

다시마 장사꾼에서 장진희라는 이름으로 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또 하나의 직업도 알게 되었다.

시인… 

다시마 장시와 시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시인이면서 장시가 된 그녀의 사연이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구례는 3일과 8일 장이 선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장이 끝난 시간에 그녀를 만났다.  


[구례 장꾼들이 즐겨 찾는 가야식당 / 사진 김인호]  

구례장터에 있는 막걸릿집 “가야식당”이었다.


“막걸리부터 한 잔 주세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고는  한 사발을 시원하게 마셨다.


“종일 장터에 있다가 끝나면 막걸리 생각이 딱 나더라고요."

“힘도 들고 목도 축이고.”  

 [그녀는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 사진 김인호]

  

막걸리 한 잔을 하고 나서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사를 시작한 것은 12년 전이에요.”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인데 아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엄마는 돈 벌 능력이 되는데 비겁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돈이 들어갈 시기가 온 것이다.


사실 그전에도 글을 쓰거나 기간제 교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일하지는 않았고 글을 써서는 밥을 먹고살 수 없었다. 

그리고 교사는 맞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다시마 장사였다고 한다. 


근데 어쩌다가 다시마를 팔게 되었나요?


“ 제 고향이 진도입니다.”

“ 진도에서 태어났고 목포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서울로 대학을 갔죠.”

“서울에서 20년을 살았고요.”

“그런데 정말 서울에서 살 수가 없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살 자신도 없어  37살에 귀촌을 했습니다.”


“그렇게 무주에서 7년을 살았어요.

농사짓고 살았죠. 돈은 거의 벌지 않고,  

농사를 지어 한 달에 6만 원 7만 원만 쓰면 살았어요.

나름 행복했는데 오래 살지 못했어요.”


“그리고 진도로 이사를 갔어요”.

진도에서도 돈을 벌지 않았어요.”

물때 따라 물이 들어오면 산에 가고 물이 멀어지면 바다로 갔어요”

산에 가면 나물이, 바다에 가면 해산물이 있으니 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돈이 필요하면 서울에서 횟집 하는 지인에게 나물이나 해산물을 챙겨 보내면 적당히 돈을 보내줘요.

그것으로 살았어요.


어떻게 보며 그녀는 돈을 벌지 않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도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답을 찾았을까?

찾았다면 다시마 장사꾼이 되지 않았겠지…. 

그녀는 자본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아니면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내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본주의보다 무서운 아들이 있었다. 

아이는 학교에 진학해야 하니까....


오래전에, 뭐 오래 전도 아니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라다크라는 마을에서 자급자족 하며 자본주의 물결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나도 매료되던 적이 있었다. 


매료된 이유는 당연하게 자본주의적 삶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노동할 권리와 함께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유를 보장받은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삶에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기에 끝없이 고통당한다.

주어진 길이 없어 방황하고 선택을 하면 그 책임도 오롯이 자신이 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끝내 그렇게 살지는 못해던 것 같다. 


“장사꾼이 되어서 시골마을을 많이 찾았어요. 거기서 할머니들을 많이 만났죠”

“그분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래된 미래의 그런 삶을  마지막으로 사는 사람들이 지금 시골 할머니들 아닐까? 하는 생각요. 

“저는 그녀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자본주의에 가장 적응하지 않은 마지막 세대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좋더라고요.


장사꾼이 좋은 게 바로 그 점입니다.


그냥 가면 이야기하기 어려운데 장사꾼으로 가면 할머니들이 경계를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더라고요.


 

3월 3일 장터


설 쇠고

대보름 쇠고

이른 매화 산수유 피고

찬비 내리는 꽃샘추위

봄을 흔들어대는 세찬 바람

매화 얼리어 색죽이는 된서리


다 지나고

봄볕 따사롭고

바람 잔잔하고

한가한 장터

양지바른 한쪽에

미역장시

해바라기로 앉아

자울자울 졸고 있다.   

 

-장진희의 시-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고 한다. / 사진 김인호]

  

막걸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전화가 왔다,


네; 안녕하세요.

저 미역장시 맞아요.

미역이 필요한데..,,,

장은 못 가겠고 언제 한 번외.

네.. 날 잡아서 갈게요,

낼모레 사이에 갈게요”


그녀는 영락없는 장사꾼이었다.


“한 여름이나 한 겨울엔 장에 나가면 손님이 없어요"

“그때는 동네 마을회관을 찾아요?”

“마을회관에서 장사를 하면 더 잘되거든요?


“사실 처음부터 마을장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느 날 파장을 하고 잠시 쉬려고 마을회관 공터에 주차하고

산책을 다녀 돌아왔더니 동네 할머니들이

되게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뭐 하는 장시냐고요.

그래서 다시마나 미역을 판다고 하니까 그럼 여기서도 팔라고 하시더라고요.

장터가 따로 있냐고 사람 있으면 그곳이 장이라고요.

그렇게 해서 마을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죠?”


다시마 장사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제가 진도로 이사하고 나서도 무주로 자주 놀러 갔었어요.

돈이 없어 궁리를 하다가 생각난 게 있었어요.

무주장에 가보니 좋지도 않은 다시마나 미역을 비싸게 팔더라고요.

그래서 진도산 다시마나 미역을 가지고 가서 귀촌한 지인들에게 판매를 했었죠.

그게 인연이 되어 다시마 장사를 하게 되었어요.”


“12년 전에 처음 시작 할 때 정말 힘들었죠.

장터 장사꾼은 자리가 생명이니까요.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처음 시작 할 때 돈을 빌려 1,400만 원어치 다시마를 구입해 창고에 넣어놓고 시작했었요.

첫날 10만 원어치를 팔았는데 이걸 언제 파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다행히 자리를 조금씩 잡고 장사도 그런대로 되는 편이라 아들의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다른 장은 안 가고 구례장만 나와요.

이제 좀 여유가 생겼어요. 아들이 다 컸으니까요.”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최근에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에 장터 이야기를 3년간 연재했어요.

장사를 하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12년간 장사를 하며 느낀 점들, 

그동안 살면서 기억되는 순간들을 3년간 풀어서 글을 썼어요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쌓여 있던 것들이 해소된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논개 이야기를 장편 소설로 쓰고 싶어요.

무주에 살 때 장수에 있는 논개사당에 자주 가봤어요.

동네 할머니들이 논개노래를 부르시더라고요.

논개에 관심이 생겨서 논개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고 있어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쉽지 않지만 이제는 좀여유가 있으니 해보고 싶어요.”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는 장터 아닐까요? 사진 김인호]

 


장사는 계속하시나요?


“장사는 팔십 먹어서까지 하고 싶어요.

 재미가 있거든요,

 장터에 가면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장사하고 있잖아요.

 저도 그렇게 늙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막걸릿집에 나섰다.

그녀는 남은 막걸리를 살뜰하게 챙겨 식당을 나왔다.

막걸리는 따로 쓸 용처가 있다고 했다.


파장한 장터에는 짐을 정리하는 장꾼들과 

마지막 장을 기웃하는 사람들 몇몇이 보였다,


어둠과 함께 5월에 초록이 노고단에서 구례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다시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진도 바다에서 건져져 

돈 없는 그녀에게 희망이 되어준 다시마와 미역들이 초록물결처럼 너울거린다.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는 장터 아닐까요"


“가게를 마련할 돈도 없는 가장 가난 한 사람에게도 희망이 되어 줄 수 있는 게 바로 오일장이죠. 

물건만 있으면 가겟세도 세금도 없는 곳,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가격으로 팔 수 있는 곳, 

돈 없는  가난한 사람도 돈을 얻을 수 있는 곳 말이죠.”


그녀는 3일과 8일 구례 농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미역과 다시마를 팔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 앉아 자울자울 졸며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님,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오후네요.
이렇게 글자를 입력하고 드래그하면 메뉴를 더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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