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리바이스의 시작은 작업복이었다.
서른 즈음에 아무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손을 볼 때마다 곱다고 했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손, 그렇기에 상처 하나 베긴 것 없는 순수한 손은 그렇게 곱상했던 것 같다. 그날도 도서관에서 공짜 책과 공짜 컴퓨터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던 도중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전화는 수선집이었다. 어제 찾아온 리바이스 청바지가 바꼈다고 했다. 나는 땀냄새에 끌리는 모기처럼 주둥이를 꽂을 곳을 찾았다는 듯이 수선집 아주머니의 귀에 오늘의 스트레스를 쏘아댔다. 물론 불온한 목적이었지만 내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흔하지 않은 리바이스 시리즈에, 그것도 블랙진. 기장도 실제 자로 재보진 않았지만 나에게 딱 맞았다. 그런데 바지가 바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아주머니는 연신 죄송하다고 했고 지금 수선집으로 좀 와줄 수 있냐고 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블랙진의 주인이 거기 와있다고 해서였다. 불쾌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고 수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선집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동네라서 사거리에서 돌아가더라도 15분 정도의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드르륵. 수선집의 문을 열자 작업잠바를 입고 기름 히터에 손을 녹이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꾸부정하게 일어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내 다리을 향했다. 그는 내가 입고있던 블랙진을 보는 듯했다.
바쁜 시간에 죄송합니다. 제 청바지 때문에요.
누런 때가 탄 곤색 작업잠바를 입은 남자는 손으로 내 바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내 청바지는 어디에 있는지 따지려고 할 찰나에 아주머니가 수선된 블랙진을 가지고 내 앞에 뒀다. 신기할 정도로 같은 바지에 같은 기장에 같은 사이즈를 하고 있었다. 난 뭔가 알 수 없는 승부욕이 생겨 그에게 되물었다.
이게 선생님 청바지일 수 있잖아요.
그는 웃으며 혹시 뒷주머니를 확인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뒷주머니를 본능적으로 주섬거리던 나는 작게 접은 맨드라운 종이가 하나 잡히는 것을 느꼈다. 왜 수선집에서 옷을 찾고 주머니를 뒤지지 못했을까. 아니, 당연한 것이 아닌가. 수선집에서 내가 맡겨둔 옷을 찾는데 주머니를 뒤져 무엇이 들었나 확인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난 당당히 종이를 빼냈다. 그건 종이가 아니라 두번 접혀진 증명사진이었다. 그의 사진은 아니었고 옅은 미소를 띈 여자의 사진이었다.
나는 무언가 진 것 같은 기분이 싫어 그를 계속 경계했지만 그는 허리를 굽혀 큰 인사를 한 후 커피 한 잔을 사겠다며 근처 카페에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오트밀 라떼를 시키자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려는 듯 말이 겹쳤지만, 나의 눈치를 보고선 나와 같은 오트밀 라떼를 시켰다. 알림벨이 진동하고 테이블에 두 개의 라떼가 얹혀졌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오늘 있었던 수선집에서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나는 그의 작업복이 자꾸 신경쓰였다. 일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 대낮에 왜 나랑 같이 노닥거리는 걸까. 그가 정말 일하는 것은 맞는 것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께는 이런저런 일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해곤 도서관에서 낮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면 집으로 와 어머니가 차려놓은 낮은 밥상에 허리를 숙이고 한 숟깔 뜨던 날들이 5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하시는 거 맞아요?
그는 한참을 이어가던 오늘의 유머를 순간 멈추고 내 말을 이해하려는듯 고개를 갸우뚱댔다. 그리고 용역회사 이름이 박힌 작업 잠바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오늘 비번이라서요.
그때 그에게서 건물 시설관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건물은 철근콘크리트로 이루어졌지만, 그 건물에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게 있어야 할 것들을 관리하는 일. 전기를 들어오게 하고, 기계를 돌려 냉난방을 하고, 소방시설을 관리하고, 자질구레한 수리나 조경도 관리하는 일. 훗날 시설관리원이 된 나는 그렇게 일을 정의했지만 그는 이해못할 자격증의 열거라던가, 자동제어 시스템에 대해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설명했다. 난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말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일의 고단함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다가도 나의 호기심을 경계하듯 자랑을 하다가 나를 관찰하는 그를 허용해주기도 했다. 단지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에게 한마디 물었다.
그 시설관리라는 거, 들어가려면 어디에서 찾아봐야 되는 거예요?
먼저 일어나겠다고 말하고선 다음날 영화를 보기 위해 지갑에 챙겨둔 팔천원을 꺼내 커피값을 계산했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본인이 사과하려고 커피를 대접한 것인데 계산하면 어떻하냐는 식으로 당황해했다. 난 대꾸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인사하곤 카페를 나섰다. 사거리에 도착한 나는 사거리 뒤편 오르막에 있는 서부 고용지원센터에 들러 내일배움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으로 2개의 자격증을 땄다.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이유는 기계분야의 기능사 자격증은 실기가 작업형이라서 용접이나 나사 절삭과 같은 배워야 될 부분이 있었는데, 정부지원이 아니면 학원비가 비쌌다. 처음으로 나라에 감사했다. 내 빈 손에 작고 단단한 돌멩이가 잡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회관 건물의 시설관리원에 지원했고, 면접은 관리실 소파에서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말을 들었다. 경력무관. 교대가능자. 나는 그렇게 문지방을 넘었다.
그때 그는 나의 퉁명스런 인사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았을까. 훗날 우리 둘은 증명사진의 여자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건 먼 이야기이고 15년전 나의 시설관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