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지성과 감성의 춤

뒷뜰의 수행자, 슬옹

by 김지향

설악산의 화려한 단풍길을 내려온 선이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어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다다랐다. 집집마다 낮은 돌담 위로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골목마다 구수한 장작 타는 냄새가 배어 있는 정겨운 마을이었다.


길을 걷던 선이의 코끝에 달콤하고 쫄깃한 내음이 스쳤다. 마침 시장기가 돌던 참이라 선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대문 없는 한옥 마당 쪽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쫓았다. 그때 인심 좋게 생긴 할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기를 열며 환하게 웃었다.


"처자, 출출한가 보네. 코가 먼저 마중 나온 걸 보니 말이야. 이리 와서 갓 찐 감자떡 좀 맛보고 가구려."


할머니의 따뜻한 부름에 선이는 수줍게 웃으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머, 할머니. 정말 염치없지만 냄새가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발길이 멈췄어요. 잘 먹겠습니다!"


갓 바른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쫄깃한 감자떡을 한 입 베어 물자 입 안 가득 시골의 순수한 맛이 퍼졌다.


"할머니, 감자떡이 정말 예술이에요! 집도 참 평화롭고 예쁘고요." 선이의 진심 어린 칭찬에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며 뒤뜰 쪽을 가리켰다.


"우리 집 뒤뜰이 참 명당이라네.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서 공기부터 다르니, 떡 다 먹고 저기 가서 잠시 쉬다 가구려."


선이는 감자떡 하나를 소중히 들고 뒤뜰로 향했다. 낡은 장독대들이 줄지어 서 있고, 바스락거리는 은행잎이 황금빛 카펫처럼 깔린 고요한 뒤뜰 한복판에서 선이는 차원이 다른 신비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낮은 돌담 사이를 이리저리 넘나들며 홀로 무술을 연마하는 도깨비, 슬옹이었다. 그는 이마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뱀 머리들이 동그란 구슬을 서로 번갈아 주고받으며 기묘한 리듬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무술 궤적을 따라 선이의 종아리에 새겨진 ‘E' 문양이 마치 정교한 시계태엽이 맞물려 돌아가듯 또렷하고 명징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무술이 절정에 달하자, 뱀 머리들이 주고받던 구슬이 슬옹이 든 방망이 끝으로 향했다. 태양의 형상을 본뜬 방망이 머리, 그 정중앙에 뚫린 신비로운 허공(虛空) 안으로 구슬이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방망이는 해보다 더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어두운 뒤뜰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하얀 빛의 줄기 사이로 영롱한 핑크빛 입자들이 맥동하듯 섞여 흘렀다.


"와아...! 정말 눈부셔. 저기, 그 신비로운 춤이랑 뱀은 대체 뭐야? 뭘 의미하는 건데?"


선이가 넋을 잃고 감탄사를 터뜨리며 묻자, 슬옹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지막이 답했다.


"이 뱀의 두 머리는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감성'이지. 이 둘은 본래 하나이나 인간의 마음속에선 늘 서로를 밀어내며 갈등한다네. 하지만 이 둘이 싸움을 멈추고 지혜의 구슬을 갈고 닦아 방망이의 중심, 즉 모든 것이 비어있으면서도 가득 찬 자리로 모일 때 비로소 온전한 빛이 태어나는 법이야."


선이는 슬옹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만난 도깨비들이 거대한 자연의 정령 같았다면, 슬옹은 어딘지 모르게 인간 내면의 지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너희 도깨비들은 우리 인간이랑 참 많이 닮았네. 가끔은 장난스럽고, 가끔은 고집스럽고... 그래서 더 친근해."


선이의 말에 슬옹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도깨비는 인간의 마음이 빚어낸 거울이기도 하니까. 우리 중엔 욕심에 눈이 멀어 어둠 속을 헤매는 저진동의 존재들도 많다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의 오만을 누구보다 잘 꾸짖을 수 있고, 인간의 슬픔을 누구보다 깊이 어루만질 수 있는 거지. 초자연적인 존재이면서도 너희 곁에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살아있는 나침반'인 셈이야."


선이는 깨달았다. 지혜란 머리만의 논리도, 가슴만의 울림도 아닌, 지성과 감성이 서로 춤을 추며 빚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우주의 조화라는 것을.





그림: 김남향 (Artist: Kim Namhyang) © 2026. Kim Namhyang. All rights reserved.


[도깨비 윙크]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려 들지 마. 모순이 아니라, 완벽한 짝꿍이거든."


양자역학의 거장 닐스 보어는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라는 멋진 말을 남겼어. 빛은 딱딱한 ‘입자’이면서 동시에 흐물거리는 ‘파동’이라는 거야. 성격이 정반대인 두 녀석이 합쳐져야 비로소 ‘빛’이라는 완전체가 된다는 거지.


네 안의 ‘이성(입자)’과 ‘감성(파동)’도 마찬가지란다. 이성만 있으면 인생이 너무 팍팍해서 부러지고, 감성만 있으면 질척거려서 길을 잃기 쉬워.


슬옹이의 두 머리 뱀처럼, 서로 다른 두 놈이 티격태격 춤을 추게 놔둬 봐. 그 긴장감이 바로 너를 빛나게 만드는 에너지니까.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어떻게 따로 떼어내겠어? 그냥 둘 다 네 거야. 꽉 끌어안아! (찡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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