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수호자, 모도리
설악산의 화려한 단풍길을 내려온 선이는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울창한 편백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어느 고즈넉한 이층집에 다다랐다. 그곳은 대대로 농수산물 도매업을 이어오며 지역의 신망이 두터운 한 부부의 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감싸는 진한 편백 향이 마치 세속의 때를 씻어내듯 선이의 정신을 맑게 깨워주었다.
부부의 마당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싱싱한 농산물 박스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흙내음 가득한 박스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인 모습에서 주인 내외의 야무진 성정이 그대로 읽혔다. 선이는 집안 곳곳을 흐르는 기운을 살피며 거실로 발을 들였다. 이층 높이로 시원하게 트인 거실 창밖으로는 편백나무 숲의 초록빛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실내에는 늘 깊은 숲속 같은 평화가 감돌았다.
부부는 낯선 방문객인 선이를 마치 오래된 인연처럼 따뜻하게 맞이했다. 정갈하게 닦인 나무 탁자에 마주 앉자, 부인은 정성스레 찻잔을 데우고 갓 우려낸 찻물을 따랐다. 은은한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질 무렵, 선이는 집안을 가득 채운 이 특별한 평온함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를 이어 번창하는 사업체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하고 맑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이 정말 평화롭네요. 사업도 오랫동안 번창하셨다고 들었는데, 이토록 맑은 기운을 유지하는 비결이 따로 있으신가요?"
선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아버님 때부터 정직하게 농산물을 다뤄온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한 비결이랄 게 있나요. 운이 참 좋았지요.”
부부는 겸손하게 말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건넸다. 하지만 선이의 눈에는 이 풍요의 ‘진짜 주인’이 보였다. 거실 벽난로 옆, 편백나무 계단 아래의 그늘진 명당에 부처님처럼 고고하게 앉아 집안의 기운을 다스리는 존재, 바로 도깨비 모도리였다.
모도리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눈을 감은 채, 집안으로 스며드는 나쁜 기운을 야무지게 쳐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맑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드는 파동을 잠재워 다시 고요한 수평선을 만드는 작업과 같았다. 모도리가 뿜어내는 정갈한 에너지는 부부가 들여오는 농수산물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신선한 정기를 띠게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 집에서 나가는 물건들은 시장에서도 유독 빛이 났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사장님, 이 집의 번영은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저기 모도리라는 도깨비가 밤낮으로 두 분의 곳간과 마음을 빈틈없이 지켜주고 있거든요.”
선이가 허공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말하자, 부부는 찻잔을 멈추고 선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점잖게 눈을 감고 있던 모도리가 제 이야기가 들리자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였건만 탁자 위 찻잔 속의 찻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예쁘게 일렁였다. 이어 벽에 걸린 마른 편백나무 가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니, 방금 숲에서 베어 온 듯 싱그럽고 진한 향기가 거실 가득 폭발하듯 번져 나갔다.
부부는 눈앞에 펼쳐진 기이하고도 향기로운 현상에 넋을 잃었다. 그동안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행운과 위기의 순간마다 비켜갔던 불운들이 비로소 하나의 생생한 실체로 가슴에 와닿는 기분이었다.
“정말... 우리 곁에 그런 고마운 존재가 있었단 말입니까? 어쩐지 이 집에만 들어오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지더니...”
부부는 보이지 않는 수호자에게 깊은 경외심을 느꼈고, 선이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자신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고마운 존재를 늘 곁에 두고 기억하고 싶다는 진심 어린 요청이었다. 선이는 정성을 다해 모도리의 야무진 자태를 화폭에 담았다. 붓끝이 지나갈 때마다 편백나무의 향기가 물감에 섞여 나오는 듯했다.
부부는 완성된 모도리의 그림을 집안에서 가장 귀한 자리에 액자로 걸어두었다. 이제 그 집의 아침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부부는 일어나자마자 정갈하게 향을 피우고, 모도리 그림 앞에 서서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도 우리를 지켜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도 당신처럼 빈틈없이, 그리고 정직하게 대지의 결실을 세상과 나누겠습니다.”
그들의 정직한 마음과 모도리의 야무진 수호가 만나자, 집안의 공기는 더욱 단단하고 평온하게 응축되었다. 그것은 마음의 작용이 현실의 풍요로 피어나는, 작지만 위대한 우주의 기적이었다.
[도깨비 윙크]
"가만히 두면 모든 것은 엉망이 된다. 행운은 질서 잡힌 공간에만 머무는 까다로운 손님이다."
물리학엔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법칙’이란 무시무시한 놈이 있어. 가만히 두면 방이 돼지우리가 되고 따뜻한 커피가 식어버리듯, 우주의 모든 것은 원래 무질서한 쪽으로 흩어지려는 성질이 있거든.
이 집이 그토록 평온한 건 우연이 아니야. 모도리가 밤낮으로 흐트러지려는 에너지를 꽉 잡아서, 아주 정돈된 ‘낮은 엔트로피’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엄청난 정성이 필요한 일이야.
너도 자꾸 삶이 헝클어지는 것 같니?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이야. 그럴 땐 마음의 빗자루를 들어 봐. 모도리처럼 야무지게 걱정을 쓸어내고 마음의 결을 가지런히 빗어주는 거지. 행운은 비로소 그 깨끗하고 정돈된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게 된단다.
어지러운 마음은 싹싹, 행운은 쏙쏙! (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