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의 길가온, 허세의 '들뜬 상태'를 털어내다
속리산의 깊은 품 안에서 그림 작업을 이어가던 선이는 습기 하나 없이 아늑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동굴 입구에는 오래된 이끼가 비단처럼 깔려 있었고, 내부에서는 기분 좋은 흙내음이 풍겨 나왔다.
"사람이 살아도 될 만큼 명당이네!"
선이가 감탄하며 발을 들이는 순간, 동굴 깊숙한 어둠 속에서 집채만 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어이, 거기 쪼끄만 인간! 감히 어딜 허락도 없이 내 안방을 들락거려? 당장 나가지 못해!"
도깨비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선이를 위협했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제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꼴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선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를 후비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집 주인치고는 성격이 참 고약하네. 근데 너, 덩치만 컸지 속은 아주 소심한 깍쟁이지? 이렇게 구석진 동굴에 숨어있는 걸 보니 딱 알겠어."
도깨비는 짐짓 코웃음을 치며 동굴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쿠르릉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떨어졌지만, 선이는 그 먼지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이게 어디서 아는 체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룻밤 사이에 산 하나를 옮기고, 성난 호랑이도 내 앞에서는 고양이처럼 빌빌댄단 말이다! 네까짓 계집애 하나 겁주는 건 일도 아니야!"
도깨비는 더욱 몸을 부풀려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위압감을 조성했다. 하지만 선이는 도깨비의 발치를 유심히 살피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산은 무슨. 너 아까 내가 들어올 때 구석에서 덜덜 떨던 발가락 다 봤거든. 그리고 너, 목소리는 큰데 눈동자는 왜 그렇게 이리저리 굴려? 누가 올까 봐 겁나는 사람처럼 말이야."
"무, 무슨 소리! 이건 눈 운동을 하는 거다! 그리고 내가 왜 겁을 내? 나는 이 산의 지배자라고!"
"지배자가 왜 빗자루 털 같은 걸 옷에 묻히고 살아? 너 사실은 사람들 무서워서 여기 숨어 지내는 거잖아. 겉만 번지르르하게 에너지장을 부풀려놓고, 속으론 '제발 그냥 가라' 하고 빌고 있지?"
선이가 정곡을 찌르며 성큼성큼 다가가자, 도깨비의 거대한 그림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이의 맑은 의식이 도깨비가 쳐놓은 가짜 파동을 꿰뚫자, 부풀려졌던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만 와! 더 오면 진짜 화낸다! 나... 나 진짜 무서운 놈이라니까!"
도깨비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에서 갈라진 피리 소리로 변해갔다. 선이는 이제 도깨비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 빗자루의 후예지? 옛날에 사람들한테 씨름하자고 덤비다가 아침이면 빗자루로 변해 버려지던 그 순진한 녀석들 말이야. 그래서 사람만 보면 자존심 세우느라 이렇게 헛힘을 쓰는 거지?"
순간, 동굴을 가득 채웠던 집채만 한 덩치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글쪼글 줄어들었다. 험악한 뿔과 근육질 몸매는 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헝클어진 머리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박한 도깨비 하나가 옹색하게 서 있었다.
"쳇, 인간치고는 눈이 너무 매섭군. 그렇게 다 봐버리면 내가 뭐가 돼."
도깨비는 금세 기가 죽어 빗자루 끝을 만지작거리듯 제 옷자락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선이는 그런 도깨비가 가여우면서도 정겨워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배낭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도깨비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길가온! 너 몸집 부풀리고 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아. 네 눈망울이 얼마나 맑은지 너는 모르지? 가짜 덩치 뒤에 숨지 말고 진짜 네 모습을 봐봐."
선이는 붓을 들어 도깨비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길가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는 작은 도깨비의 모습이었다. 붓끝이 지나갈 때마다 길가온의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조금씩 풀렸다.
"진짜... 내가 이렇게 생겼어? 안 무서워 보여?"
"무서운 게 아니라 정겨운 거지. 너는 이제 동굴 속에 숨어서 남을 겁줄 필요 없어. 빗자루의 후예답게 사람들의 마음속 먼지를 싹싹 쓸어주는, 그런 멋진 길잡이가 되면 되잖아."
그림이 완성되자 선이는 그것을 길가온에게 건넸다. 자신의 초라함을 숨기려 애쓰던 도깨비는, 그림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진짜 자신'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는 낡은 빗자루의 혈통이 부끄러운 상처가 아니라,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소중한 재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오케이! 이제 나도 동굴 밖으로 나갈 거야. 길 한복판에서 사람들하고 진짜 씨름도 하고, 친구도 사귈래!"
길가온은 쑥스러운 듯하지만 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목소리로 외쳤다. 동굴 안의 눅눅했던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두 존재가 나누는 맑은 웃음소리가 속리산의 푸른 숲으로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도깨비 윙크]
"힘 잔뜩 준 '들뜬 상태'는 금방 방전된다. 가장 힘을 뺀 '바닥 상태'가 진짜 너의 실력이다."
양자역학엔 ‘들뜬 상태(Excited State)’와 ‘바닥 상태(Ground State)’란 게 있어. 전자가 외부 바람을 잔뜩 넣으면 붕~ 뜨는데, 이걸 ‘들뜬 상태’라고 해. 덩치는 커 보이지만 사실 엄청 불안정해서 금방 툭! 하고 떨어질 운명이지.
길가온이 몸을 집채만 하게 부풀린 게 딱 그 짝이야. 남들 겁주느라 잔뜩 ‘들떠’ 있었으니 얼마나 피곤했겠어? 반면, 힘을 쫙 뺀 진짜 모습은 에너지가 가장 낮고 안정적인 ‘바닥 상태’란다. 초라해 보인다고? 천만에! 그게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단단한 진짜 모습이야.
너도 혹시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에너지를 펑펑 쓰며 ‘들떠’ 있진 않니? 어깨에 힘 빼고 툭 내려와 봐. 가장 편안한 네 모습일 때, 빗자루질도 춤처럼 가벼워지는 법이니까.
허세는 펑! 실속은 꽉! 알겠지? (찡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