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누기 : 365일 24시간>
2017년 나의 나이팅게일에게
혹시 기억하시나요? 아니, 기억 못 하셔도 괜찮아요. 제가 하나도 안 까먹고 다 기억하거든요. 겨우 잉크도 마르지 않은 간호사 사원증을 목에 걸고 병원에 간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무렵이었어요. 대학교와는 달리 병원은 마치 총칼 없는 전쟁터 같았어요. 이리저리 무기도 없이 맞고 나니 저는 독립이라는 큰 벽에 닿았습니다. 이제는 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환자를 봐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죠.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한 걸음을 비틀비틀 내딛는데, 당신은 내 뒤통수에 대고 “너 아직도 안 했니? 너 기다리다가 환자 숨넘어가겠다.” 걷지 말고 뛰라며 재촉했죠.
먼지가 쌓인 창고로 저를 데려가 “너랑 같은 월급을 받는 게 짜증 난다.” “너 같은 애한테 간호사 면허증을 줬다니 내가 다 창피해.”라며 빚쟁이처럼 쏟아냈을 땐 그냥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날 그만두었다면 어땠을까요. 아 오해하진 마세요. 원망하려고 이 편지를 쓴 건 아니니까. 원망한다면, 그때 왜 더 모진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일 거예요. 당신이 날 더 모질게 대했다면, 저는 그날 환자에게 더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었을까요.
폭포수처럼 새빨간 객혈을 쉼 없이 뱉어내는 환자 앞에서 저는 당황해 아무것도 못 하고 손을 벌벌 떨었죠. 그런 당신은 “비켜”라며 나를 밀어내고, 불안해하는 환자를 안심시키고 쇼크가 오지 않게 수액을 빠르게 틀고 지혈제를 달아주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상황을 대처하는 당신이 저는 의학 드라마에서 본 어떤 장면보다도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 후로 당신을 조금 좋아하게 되었어요. 나를 한없이 혼내도 받아들이기로 했죠. 당신은 내 눈에 진짜 간호사였으니까요.
그래도 이러시면 안 됐습니다. 저도 이제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어엿한 4년 차 간호사가 되었는데 그런 실수를 할까요. 당뇨병 환자의 혈당이 갑자기 떨어졌을 때 당신은 제게 말했죠. 인슐린을 잘못 투여한 것이 아니냐며 합리적 의심이라고요. 합리적이란 단어는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습니다. 의사의 처방대로 인슐린 용량을 투여했고, 저혈당 증상이 올까 계속해 지켜본 저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나요. 당신은 뒤늦게 제 잘못이 아닌 환자의 혈당이 조절되지 않은 것이라는 걸 알고 술을 사주며 제 기분을 달래주었죠. 웃으며 술을 따라주는 당신이 저는 마녀 같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매 순간 저를 의심하는 바람에 이제는 저조차도 제 행동을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죠. 그래서 투약 실수를 예방하니 이 또한 당신 덕분이겠네요.
그때의 시간을 겪고, 저는 이제 전쟁터 앞에서 신규 간호사를 진두지휘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당신이 왜 그렇게 모질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총칼 없이 맨몸으로 싸우는 저 힘없는 병사들에게 무기를 쥐여주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맞는 무기를 찾아주고 싶습니다. 제대로 잘 쓸 수 있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런 선배가 될 수 있겠죠? 어느덧 6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같은 길을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습니다.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혼나던 때와는 달리 저도 이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부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