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업무 사이 환장의 콜라보
사시사철 끄적거리긴 했기만 올해는 특히 기록의 효용성을 생각한 해였다. 다이어리에 적는 일기뿐 아니라 회사에서 쓰는 업무일지도, 어떻게 해야 나중에 찾아보기 편할까 고민하고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연구했다. 누가 보면 그냥 할일없이 텐바이텐을 돌아다니는 걸로 봤겠지만, 사실 자아탐구, 미래 혁신, 세계 평화까지 연결되는 위대한 작업 중인걸. 늦게라도 알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2022년을 코 앞에 둔 지금, 미래 혁신과 세계 평화를 위한 고민은 아직 진행 중이다. 내년에 무슨 다이어리를 어떻게 쓸지는 나중에 적을테니, 이번 글에는 2021년 올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적어야겠다. 이런 건 생각날 때 빨리 적어야 유물 신세를 면할 수 있다.
2021년 기록의 특성을 대략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일상 기록을 더 다채롭게
인풋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그냥 심심풀이로 본 책이나 영화가 기획안을 쓸 때 떠오르기도 하고 반대로 회사에서의 경험이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상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경험한 콘텐츠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순 없다. 게다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걸 볼 때마다, 엄청나게 짙은 목적성을 가져야 한다면 어느 순간 머리가 터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다이어리-먼슬리에 내가 읽은 책이나 영화를 개별 서식으로 적고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재미난 책을 읽었다면 딴 거 떠올릴 필요 없이 먼슬리 하단에 파란 펜으로 제목만 적으면 되는 것이다. 나중에 어떻게 써먹을지는 미래의 내가 할 일이니, 즐거움만 가진 채 발 닦고 잠이나 자겠다는 의지.
2. 단권화의 한계, 혹은 개인화된 바운더리
일상과 업무는 서로 엄청난 영향을 받고 그것들을 어쨌든 다 해내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런 이유로 일상-업무 스케줄러를 합쳐버릴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단권화에 미친 사람이니까 (사실 그렇게까지 미치진 않았다. 첫 글이니까 과장된 단어로 흥미를 돋우고자 했다. 죄송합니다) 스케줄러도 한 권짜리로 들고 다니면 얼마나 효율적이고 깔쌈하겠는가. 그런데 나름 회사 생활을 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그 두 개는 분리를 시켜야 함을 깨달았다.
다른 이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To Do와 Diary의 경계가 명확한 것이 중요했다. To Do는 해야 할 일이고 Diary는 일기, 그러니까 한 일을 뜻한다. 일상의 경우 Diary의 역할이 중요했고 업무의 경우 To Do의 역할이 강했다. 오늘 일기에 내가 해낸 너절한 뿌듯함을 적으며 HeAliNg을 하려는데 바로 옆에 (해낼지 안 해낼지 모르는) 50가지 리스트를 보는 건 꽤나 불쾌했다. 나의 kibun은 세상 소중하기 때문에, 완벽한 단권화를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물론 핸디 다이어리를 만나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 다음 화에 계속...)
3. 업무일지와 다이어리를 활용한 아카이빙
업무용 기록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A7 포켓 노트에 데일리 일지를 적는다. 한 권 당 3-4개월씩 쓰는 것 같은데, 지금 쓰는 일지가 6번째다. 망했으면 망했다고 적고 흑흑 울고 싶으면 광광 우럭따고 적었다. 완전 '쌩' 기록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일기보다 웃길 때가 많다. (적을 땐 안 웃겼겠지, 당연하다) 하지만 로우 데이터답게 특정 키워드의 흐름을 확인하거나 한눈에 모아보기는 힘들었고, 이걸 위해 2021년엔 따로 업무용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데일리는 적던 대로 신명 나게 적고 몇 주,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주요 항목들을 뽑아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사실 이 업무 다이어리는,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알라딘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스누피 다이어리를 사용했는데, 문제는 이 깜찍한 스누피가 다이어리의 정석 구조를 따르고 있다는 거였다. 일단 위클리에 옮겨 적고 그 내용을 토대로 먼슬리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위클리를 옮겨 적을 때마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딘지 시간과 정신의 방을 들락거려야 했다. 몇 주에 한 번씩, 그것도 주요 업무만 적는 거라, 항상 짜증이 솟구치기 직전에 마쳤지만. 그래서 어쨌든 11월까지 적을 수 있었던 거다. 암튼 업무일지에서 위클리는 하등 쓸모가 없었고 나중에 확인도 안 했다. 스누피 친구의 위클리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가로형이었는데 이 점도 위클리의 무용지물에 한 몫했다. 물론 업무 다이어리 자체가 처참히 실패한 건 아니다. 먼슬리 페이지에서 업무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건 굉장히 좋았다. 나중엔 업무 별로 컬러 인덱스도 지정해서 채워 넣고 그랬다.
업무 기록에 있어서 '모아보기'는 좌충우돌이었다. 실패라고 생각한 업무 다이어리도, 사실 더 효율적인, 나에게 핏한 방식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해 준 계기이다. 무엇보다 도움이 된 건, 업무에서 위클리의 역할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업무 다이어리는 할 일이 아닌 한 일을 적는, 아카이빙이란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 일만 적은 위클리는 세상 쓸모없었지만, 일하다 보니 업무의 To Do로 봤을 땐 위클리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런저런요런조런 방식을 시도하면서 점점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고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찾는 중이다. 그래도 나름 즐거운 여정이다. 아흔 넘어서까지 탐구할 자아가 남아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글이 길어졌다. 다음 글에서는 위의 특징을 가진 내가, 그래서 2021년에 어떤 범주의 기록을 했고, 각각의 범주에 어떤 노트를 사용했는지, 그리고 각 노트를 어떻게 구성했는지 정리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