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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개 Apr 05. 2023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 마

4년 전 여행일지 다시보기

책장정리를 거하게 하다가 이전에 썼던 노트를 발견했다. 이건 그 중 하얀 노트를 보고 적기 시작한 글. 


독서노트, 영감노트, 어쩌구 저쩌구 노트. 그렇게 매번 용도를 나누는 건 중학생 때 졸업했다. 일정 기간 동안 노트는 딱 한 권만 들고 다니기. 그렇게 다닐 때 가장 좋은 점이 있다면, 나중에 되짚어 볼 때 할 일이 배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2018년 6월부터 8월까지. 나는 대학생이었고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무슨무슨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합격했고 혼자 프랑스에서 몇 주를 보내게 되었다. 와하학, 장하다 내 자신! 하지만 기분 좋은 일만 있진 않았다. 당시의 나는 가난한 유학생에 지원금은 여행을 다녀온 후에나 들어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일을 해결해야 했다. 당시엔 너무 ------한 나머지 ---------한 적도 있다. 아무리 --------였대도 그런 기억은 --------하게 남아 가끔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너무 비참해서 자체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그 때 썼던 일기 중 몇 개를 여기에 옮겨두려 한다. 똑같이 긴 여행을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슬프든 기쁘든 도움이 되겠지.


*이 글은 2022년 11월, 퇴사 후 런던 여행을 준비하며 썼다.



2018년 6월 2*일

경유하러 가는 하네다행 비행기에서.


내 주위로 총 세명의 아기가 번갈아가며 울었지만, 피곤했던건지 바로 잠들었다. 하네다 공항 55분 출발이라면서 왜 앞당겨졌는지 모르겠다. 포켓몬도 못보고 너무 속상하다. 다음엔 하네다 경유로 한 5시간 잡아둬야지. (p.s 다음은 없었다) 내 왼쪽 여자가 화장을 하기 시작하는데 나는 눈곱도 안 뗐다. 내려봤자 새벽 네시에 할 수 있는게 있을지? 세수나 하자.


영화 볼만한 게 많았는데 라그나로크 1개만 보고 블랙팬서는 중간에 끊겼는데 그냥 다시 안 틀었다. 나는 왜 영화 보는게 어려울까? 멍하니 있는 기분이라?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 SNS랑은 또 다르잖아. 그러고보니 여행 다닐 때 폰 하느라 볼 거 못보고 할 거 미루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네. 그러지 않도록 미리 마음을 다잡자. 


사실 여행 많이 다녀본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실감 안 나는 여행은 처음이다. 그런 기억으로 통째로 얼리고 싶진 않다. 많이 적고 많이 생각해야 낱장이 아닌 권으로 간직되는 듯.


그리고 나는 공항에서 캐리어를 분실했다... 씩씩하게 분실신고하고 숙소로 들어왔는데 학교에서 보내준 이유인 탐구 계획을 3일이나 4일 내내 지키지 못했음.


2018년 6월 2*일 아침 6:53


아침에 환불하러 나갔다가 모노프리 구경하고 돌아와서 캐리어 기다린다고 숙소에 갇혀있었다. 계획조차 못하고 썩는 기분이라 서럽고 억울하기까지 했다. 사장님이 돌아와서 맥주 한 잔을 주며 나가서 에펠탑도 보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등을 떠밀어 줘서 나왔는데, 나오길 잘했다. 카메라 들고 나가서 인터뷰 몇 명 따고 에펠탑 영상도 찍음. 에펠탑 쪽으로 걷고 걷다가 사이요 언덕 생각이 나서 그 쪽으로 향했고 결과적으론 그 지역 탐구 주제들 중 하나를 수행한 셈이 되었다. 이걸 보고서에 어떻게 정리할 진 아직 모르겠지만... 아, 하루를 돌아보며 생각한건데 사진 찍는 것도 재밌지만 영상 따오는 작업은 더 즐거운 거 같다. 


같은 날 오후 8:32

(공항에서 없어졌던 캐리어가 왔음. 감격한 상태)


캐리어 풀자마자 외출 준비 호다닥해서 바람같이 나갔다. 그 동안 이걸 못해서 우울했던 건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샹젤리제 거리를 힘차게 걸어가는데 뒷꿈치에 붙여놨던 밴드가 말려올라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익숙한 고통을 잊어버리고 미리 예방하지 못하다니... (이 인간은 놀랍도록 본인에게 관대하지 못하군요. 2022년의 저는 자신에게 너그러워졌답니다) (2023년의 저는 한층 더) 숙소로 돌아와서 누워있는데 얼굴에 두드러기 같은 게 났다. 아, 미니 선풍기. 이게 없었으면 난 이미 죽었다.


2018년 7월 *일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슬픔에 빠져있었음)


그래서 지금? 지금은... 마레지구 그 큰 거리에 성당이 있길래. 거기 앞 벤치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무료입장과 의자 오조오억개의 조합, 멋지다. 


방금 나의, 어떠한 패턴을 깨달았다. 나는 작은 우물 안에서 안달복달하는 면이 있다. 더 멀리까지 나가볼 생각도 못하고 말이지. 분실 보상이고 뭐고 캐리어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좀 지낼만 했을까. 음... 그만 생각하자. 우물 안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 일단 당장 지금. 한 번도 안 가본 곳에 가볼거다. la defanse를 갈까 생각 중이다. 오늘은 2만보 넘게 걸을거야.


(이렇게 간 la defanse는 프랑스 최애 장소가 된다)


2018년 7월 *일

내가 구경하고 싶은 곳과 선물 사기 위해 둘러볼 곳!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게 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이때 주변에 신세진 게 너무 많아서 그들을 위한 선물 구매에 버닝하고 있던 듯 하다. 보답은 당연한 일이고 선물을 고르는 건 즐거웠지만, 과거의 나에게 한 마디 해줄 수 있다면 그래도 네가 구경하고 싶은 곳에 들리는 걸 더 우선하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그리고 파리를 떠나 남부에 위치한 아비뇽으로 향함


2018년 7월 *일


다사다난 많은 일이 있었지만 도착하니 다 까먹었다. 역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 2층에 왔는데, 이렇게나 사람이 없다니. 파리와는 다른 풍경이라 낯설다. 발바닥이 너무 아픈데, 흑흑. 냅다 돌아다니면서 경험을 쌓는 것도 좋지만 잠시 앉아서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옵션이 아니라 필수다, 필수. 


2018년 7월 *일 오후 4:06


지금은 잠깐 숙소 들어와서 쉬고 있다. 아아아아 여유롭다, 왜냐면 아까 처음 나가서 인터뷰를 세 개나 땄거든. 스텝 분께서 도와주실지 몰랐다. 왜냐면 새로운 손님들이 계속 올거고 그 사람들 관리까지 해야하니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한인민박에서 만난 귤님 얘기가 여러 번 나와서 너무 반가웠다. 얼마 전에 그 분과 아주 오랜만에 만나서 블로그 이웃을 맺었고 덧글로 인사도 나눴다. 서로의 글을 볼 수 있는 관계라 좋다.  


같은 날, 저녁


강 건너는 수상택시가 있길래 한 번 타봤는데,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건너간 곳에서 바라본 이 쪽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자연보단 도시 구경을 좋아하는데,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여행을 하며 사람 없는 강변을 지날 때마다 이십분은 넘게 머무르는 것 같다. 아지랑이? 꽃가루? 그게 뭐든 샤랄랄라 날리는 그 장면이 참 좋았다. 강물에 빛바랜 형광색 물이 든 채 조금씩 흘러가는 것두! 넘 좋았어.


2018년 7월 *일


무료 공연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해서 스텝 분, 다른 두 분까지 넷이서 길을 나섰다. 길에서 본 포스터를 보고 공연장을 찾았는데 공연 시작한 지 8분이 지나있었다. 입장이 안 된대서 괜히 아쉬운 마음에 이런저런 공연 시간과 가격을 물어보고 다녔다.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풀낮잠을 잤는데 그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알찬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치곤 볕이 남아있을 때, 내일 '보고싶은 공연'을 보자! 하고 4명 모임은 파했다.


만화책을 하나 샀다. 관객이 아닌 축제 관계자의 시각에 맞춰진 만화, 무려 풀칼라! 당연하게 구입했다. 그런데 거기 직원이 '이걸 산다굽쇼?' 하면서 너무 당황길래 나도 당황했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아비뇽에서 의미있는 소비 TOP5에 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미래의 나: 인정)


저녁엔 스탭 분이랑 식당에 갔다. 계속 눈여겨봤던 피자집에 가서 까르보나라 크림피자를 주문했다. 짭조름한데 계란이랑 먹으니 너무 맛있었다. 맥주도 짱.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런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이야기가 좋다. 집에 오니 거의 열한시 반쯤. 이렇게 늦은 시간 동안 밖에 있던 건 이번 여행에서 정말 처음이다. 


라벤더 투어를 포기했지만 그래도 잘한 결정이겠지 (미래의 나: 아니오) 아비뇽은 아쉬운 도시. 다음에 또 온다면 정말 남부 프랑스만 돌아도 될 거 같다. 


아~ 과거의 나야~ 투어 그거 언제 또 해볼 수 있다고~ 그냥 시원하게 다녀오면 되지 예산 아낀답시고~ 신청했던 거 취소하고~ 왜 저래~ 간 대박 콩알만 해~ 


아, 드디어 음식 같은 걸 먹고 있다. 함께하는 여행에 짜릿하게 기뻐하면서 말이지. 


-


그리고 그 다음 날인가, 숙소에서 빈둥대면서 적은 투두리스트에서 '대외활동 지원서 작성하기' 발견. 그렇게 합격한 대외활동을 시작으로 몇 년 후 나중엔 그 회사에 입사해서 3년을 일하게 된다. 


저 날 점심은 케밥을 먹었네요. 


2018년 7월 *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핸드폰 시간으로 오후 7:49.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는 길이다. 코코 영화를 봤는데 인생 영화 될 것 같다. 음악이 너무 좋다. 대외활동, 이번엔 정말 붙고 싶다.(붙었습니다)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재밌었습니다)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볼까. 이번 여행의 의미 같은 거. 일단 내가 하고 싶은 분야(다면적이지만)에 한 발짝 다가갔다. 그리고 학교에서 좋은 기회를 줘서 외국도 다녀오고, 학원 다닐 기회도 생겼다.


이때 다닌 학원은 애프터이펙트 학원. 이 때 배운 걸 아직도 써먹고 있다. 


학원에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아침에 늘어져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서 돌아다녀야지.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집 밖'에 있는 '나 자신'에게서 힘을 얻는 것 같다. 타인은 누구도 결정적인 구원이 되지 못한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갑자기 왜 비장함?)


공항은 수속하느라 오억년 걸려서 여유있게 구경하진 못했다. 그래도 일찍 도착한 게 어디. 원래 일정대로 아비뇽에서 하루 더 묵고 바로 공항으로 향하는 TGV를 탔다면, 연착할까 불안해서 돌아가셨을거다. (아 이래서 투어를 취소했군요. 오해해서 미안 과거의 나) 


그리고 여행에 대한 나의 취향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바다는 무섭지만 강물 흐르는 건 넋 나간 듯 구경하고, 그냥 마구 걸어다니는 것도 좋은데, 하루하루 대충이라도 계획은 있어야 해. 혼자 다니는 게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할 땐 마냥 즐겁다. 마트 구경 역시나 좋아하고. (참고하겠습니다) (참고해서 2022년 12월 런던 여행을 다녀왔다)


아아, 뭣보다 성실함이 필요하다! (걱정마세요 당신은 제법 멀쩡한 사회인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부담갖지 않고, 무리하지 않되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내자!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여행에서도 일단 밖에 나가면 기분이 많이 나아지더라. 




이 여행에서 깨달은 게 많다는 걸 새삼 느낀다. 여러 번의 불필요한 포기를 했고 그러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이래서 일정한 수입이 중요하구나, 소비 습관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같은 것들. 


같이 먹는 피자가 맛있구나, 하는 과거의 나, 알고 있니? 그래도 넌 '아 나는 여행은 누군가랑 같이 해야하는 타입이구나!'라는 걸 3년 후에나 깨닫는다는 사실을? 경험은 다양하게 쌓을수록 좋다. 버릴 경험이란 없는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바로 그게 시간을 버리는 것. 그걸 늦게라도 깨달은 후엔 서툴게라도 다양한 도전을 시도했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라고요. 배포가 확 커지진 않겠지만요. 다르게 생각하면, 저렇게 짠내나는 여행을 했기 때문에 위에 것들을 알게 된건가 싶기도 하다. 인과관계는 순서만 바꾸면 되니까, 중요성에 비해 말장난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2022년 11월 개인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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