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렛저널에서 영감 받은 나만의 '드래프트 노트' 활용기
어릴 땐 노트 한 권에 하나의 토픽만을 주고 꽉꽉 채우려는 로망이 있었다. 어떤 '단행본 시리즈' 같은 걸 만들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건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며 그렇기에 로망으로 두기도 무의미하다! 정리하고 분류하는 걸 즐기지만 셋업 단계부터 이리저리 꽂는 건 영 맞지 않았던 거다. 뒤섞인 와중에서 규칙과 효용을 찾아내는 걸 좋아했던 건지도.
그래서 얌전히 보통의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고, 공부 필기가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험생 시절을 보냈다. 적고 나니 너무나 오래전이라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안갯속을 헤매며 회상한 결과 그 당시의 나는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 보는 게 귀찮아서 시험 기간엔 무조건적으로 단권화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방법은 주변에서도 많이들 강조하고 실행했던 거라 딱히 나만의 방법론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가방에 볼펜 하나 덜렁 넣고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이때도 끄적이는 습관은 여전했지만 공부는 열심히 안 했다. 맨날 딴생각만 했기 때문에 천억 개의 노트에 백억 개의 잡다한 주제를 적곤 했다. 다양한 노트를 쓰고 일기를 적으며 지내다가, 어느 날 '불렛저널'이라는 시스템을 알게 되었다. 불렛저널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너무 귀찮다.
그래도 설명을 첨부한다. 이 아저씨가 대신 말해줄 것이다.
불렛저널을 알게 된 후에 다이어리를 그렇게 적었다. 그러다 심신 복잡한 대학생에겐 있는 구성이나 써먹는 게 낫겠다는 걸로 합의점을 찾았고. 시스템으로만 남은 불렛저널은 지금까지도 업무일지나 각종 스케줄링에 제법 쓰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불렛저널이 특정한 '한 권'의 물체라기보단 무형의 '시스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불렛저널에서 앙칼지게 뽑아 쓴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기호 활용.
참 잘했다는 스티커나 구구절절 긴 문장을 쓰지 않더라도 담백하게 기록할 수 있다. 투두리스트 체크는 사실 새로울 게 없지만, '내가 필요한 기호를 내가 직접 지정해서 쓴다, 첫 상태(·)에서 가변한 상태(v, x 등)를 고안한다'는 방법론에 큰 영감을 받았다.
두 번째, 별 일 없이 이어 적는다.
12월 기록을 적다가 리스트업 할 일이 생긴다? 그럼 다음 장에 그 목록을 적는다. 12월 스케줄 사이에 느닷없는 프리노트가 껴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별 일 아니다. 표지 뒤 쪽 인덱스란에 쪽수와 타이틀만 적으면 된다. 그리고 12월이든, 1월이든 간데 그 리스트가 필요하면, 인덱스에서 그 페이지를 찾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전 글에서 말했듯, 어린 나는 정석이라고 믿었던 영역에 사실 정석이란 없음을 알게 된 후로 많은 변화를 얻었다. 이건 단순히 아하! 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던 게. 내가 주워듣고 구경하던 게 사실이 아니라면. 이제 형형색색 개비싼 스티커로 한 페이지를 꽉 채우고, 간지 나는 마카나 프리즈마 색연필로 개쩌는 그림을 그려놓는 게 기록의 정석이 아님을, 이제 거기서 풀려나도 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아무도 날 가둔 적 없었지만 암튼 난 자유가 되었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 뭔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 아마 중학생 때쯤인가... 고등학생 때인가... 백 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조용하지만 큰 파장이었다. 대학생 때 알게 된 두 번째 요소도 내 기록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서노트, 식단일기, 짱귀여운스티커를 많이 붙인 일기 모음집 등등... 빈 노트 하나를 완벽하게 한 가지 용도로만 쓰지 않아도 된다! 잘못한 게 아니다! 안되면 안 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은 넓고 방식은 많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거창한가? 아니 충분히 가치 있는 네이밍이라고 생각)에 시간과 나름의 습관이 쌓여 지금의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내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변할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는 걸 인정하면,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워진다. 제삼자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다고나 할까.
지금 기록의 큰 틀 중 하나는 단권화인데. 너무 많은 물건을 보면 토하는 성격 때문이다.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나의 편안함과 기록의 효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에서 온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요즘, 회사도 다니고 개인 프로젝트도 하다 보니 완벽하게 하나의 노트/다이어리만 사용할 순 없다. 이 와중에 나만의 원칙을 지키겠다고 불편하고 쓸데없는 작업을 벌일 순 없다. 세상엔 이미 절대 어기면 안 될 규칙이 너무 많다. 내가 나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가볍고 유동적으로, 별도의 조치를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기와 업무일지를 나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 나누지 못하는 게 있다면 바로, 그냥.. 그냥 노트이다. 막 쓰는 노트. 이거 여러 개를 둘 수가 없다.
노션도 쓰고 네이버 캘린더도 쓰고 톡방도 있지만 디지털 소재에서는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다. 방금 적은 문장이 나중에 활용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표시는 해둬야 한다던가. 내용을 적으면서 떠오른 이 문단 안의 분류 항목이 있다던가. 이 내용은 최종에 적히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옆에 표시는 해둬야겠고 그렇다고 최종본에 작성될까 걱정이 된다거나 하는 순간들. 이런 상황에 아날로그에서는 취소선만 찍 긋거나 새로 스티커를 붙이거나 문단 사이사이를 가로질러 테두리를 쳐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기획안을 적든 아이데이션을 할 때 일차적으로는 노트를 펼친다. 뭔가를 '완성하기 위해'서만 적는 건 아니다. 가족여행 때 쌀 짐 리스트를 적어보거나. 기타 레슨 과제를 적는다거나 할 때도 손으로 펜을 들고 노트에 적는다.
사용처가 이렇게나 다양한데, 목적마다 노트를 따로 둔다?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나의 N평짜리 (N≤5) 방이 폭발하고 있잖아요. 자잘한 목적마다 완벽한 한 권을 만드는 건, 그거야 뭐 꼬꼬마 때 내다 버린 목적이기도 하고. 새로운 노트를 만들어서 표지에 ♥기타 레슨♥이라고 적는 일에, 나는 너무 지쳐버렸다. 노트가 얼마나 얇든 간에 내가 그걸 끝까지 못 쓸 거란 사실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다 쓰지도 못하고 방치되는 물건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 나락으로 떨어진 효용성에 새 노트를 펼칠 때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없다. 나는 이제 어떤 물건을 끝까지, 오롯하게 다 썼을 때의 즐거움을 너무 잘 알아버렸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개시보단 완성이 끌리는 나이... 아흔다섯 살.
그래서 결론은. 노트 하나를 정해서 거기에 나의 모든 기록을 채워 넣는다. 다이어리에 하루를 정리하며 쓰는 '일기'가 아니라면, 잴 것도 없이 이 노트에 적힐 것이다. 나름 테마도 있다. 생각을 정리하며 '어떤 것'의 초안이 될, 원형들이 모인 곳이라 '드래프트 노트'라는 이름도 정했다. (사실 이름은 이번 노트부터 정했다:)^^*) 여러모로 올해 하반기는 네이밍 술독에 빠진 시기인 것 같다. 오히려 좋아. 뭐라고? 2022년 1월이 시작되었다고? 사실 이 글은 12월에 쓴 글을 옮겨 적은 것이다. 나는 시간을 달리고 있다.
보통 200페이지 내외의 모눈 노트를 쓴다. 쌓은 드래프트 노트가 많다. 오늘로 N번째 노트를 마지막 장까지 조져버렸다는 자랑질을 할 거다. 어떻게 썼고 저쩧게 꾸렸는지까지 얘기하려면 넘 졸리니까. 끝에 어떤 식으로 작별을 고했는지만 정리하려 한다. 짧게 말하자면 '메모 습관의 힘'의 저자가 노트 목차를 엑셀에 만들었다는 얘길 읽고, '어라 엑셀까지..? 에반데?' 하면서 받아 적은 걸 토대로 나도 만들어서(ㅋㅋ) 노트 앞에 붙였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번에 혼쭐 내준 노트는 인디고에서 나온 프리즘200밴드노트, 노란색이다. 모눈형에 밴드까지 달려서 안 살 이유가 없었다. 10월 25일에 처음 펼쳤고 12월 17일 마지막 장을 썼다. 두 달도 안되었는데 200페이지를, 신명나게도 썼다. 연말이라 끄적일 일이 많았다.
원래 색깔 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뒀다. 그런데 한 번에 정리된 항목이 있는 게 아니니까 인덱싱 하기 불편하지, 노트는 포스트잇 날개를 펄럭이며 거의 비행이 가능할 정도가 되어가지. 그렇다고 손으로 적기는 귀찮고 깔끔하지도 않아. 그렇게 불편하던 와중에 '메모 습관의 힘'에서 관련 구절을 읽은 것이다.
저자의 항목에 따라 나도 내 인덱스의 항목을 꾸렸다. 레퍼런스와 많이 다른 건 없었고 backlink 정도만 추가되었다.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은 theme이랑 category였는데, 내 노트에 맞게 만들다 보니 해당 단어의 의미부터 재정의해야 했다. 큰 범주와 작은 범주로 나눌 것인가? 그렇게 하기엔 겹치는 형식이 많다. 범주를 어느 정도로 나눠야 미래의 내가 덜 불편하려나? 같은 것들. 고민 끝에 theme은 기록 동기(환경), category는 기록 형식(내용)으로 두고 상/하위 범주가 아닌 별도의 동일 범주로 설정했다. 카테고리 단계가 2개뿐이라 서로 대응할 항목이 1:1 뿐인 범주가 없도록 특히 신경 썼다. 여러 개를 묶으려 만드는 '범주'인데, 쓸 경우가 하나뿐이라면 무의미하고, 너무 자잘한 분류라는 뜻일 테니.
keyword(내용)을 적은 수에는 중요도 란에 각 내용의 중요도를 체크해 넣었다. 이것도 단계부터 기준까지 다시 정하기로 했다. 이 내용 자체가 얼마나 중요하고, 작성에 공을 들였는지는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끝까지 조져진 지저분한 노트를 다시 들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인덱싱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 그것만 기준으로 두고 정도의 차이를 나눴다. 그래야 미래의 내가 울지 않겠지...
중요도는 총 4단계로 나눴고 이렇게 저렇게 잘 나눴다. 나중에 브런치에 적을 일이 생기면 그때 또 적어봐야겠다.
노트 200페이지를 하나하나 들춰서 작성해야 할 만큼 귀찮은 작업이었다. 책 보고 재미 삼아 따라 해 보기엔 사실 많이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그냥 끄적인 것들에 왜 인덱싱 작업까지 해야 했냐면, 나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굳이 해야 할 만큼, 다시 볼 내용이 많았냐고? 하면 네그렇습니다. 단권화. 한 권의 노트만 쓰는 것. 그래서 사용처가 많은 만큼 내용도 다양했고 추후 확인이 필요한 페이지가 많았다. 특히 업무와도 혼용해서 쓰는 만큼 초기 기획을 체크하거나 아이데이션을 참고할 일도 많았다. 사실 드래프트 노트라는 이름처럼, 적어둔 내용을 바탕으로 엔간한 보고서나 기획안은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내 삶이 회사에만 있지는 않지 않은가? 나에겐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등등. 어쨌든 개인적인 기록인 경우엔. 노트에 적어둔 것 자체가 완성이고 나중에 참고할 일도 많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조져진 노트라고 영원히 침대 밑에 파묻일일은 없을 것 같았다. 뻔질 하게 찾아보면 찾아봤겠지. 그때 딱 표지만 펼쳐서 항목 체크 딱 해서 딱 참고하면 시간 에너지 모두 아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 귀찮은 작업을 다 했다.
그래서, 이제 노트 한 권을 다 썼으니 새로운 노트를 쓸 것인가? 당연하다. 그럼 당장 교보문고로 달려갈 것인가? 당연.. 하지 않다. 일단 집에 있는 엥간노트들을 다 써버릴 작정이다. 알라딘에서 겟챠 했던 30절 노트가 있는데 밴드형에다 모눈이라 다음에 혼쭐날 친구는 이 친구가 될 것이다.
사이즈는 30절. 가로길이가 기존 노트보다 짧긴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좀 더 가볍고 콤팩트하다. 작년에 가계부로 쓰던 무선 노트도 있는데, 이것도 언젠가 한꺼번에 혼쭐 내주고 싶지만 드래프트 노트를 사용하는 방식 상 무지는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일단 30절 먼저 쓰고 생각해보지 뭐. 136페이지라 금방 쓸 것 같다.
다음 DN엔 일주일에 한 번은 노션에 인덱스를 남기려 한다. 분류엔 딱히 신경 안 쓰고, 내용과 backlink 정도만 남길 예정. theme이나 category를 설정해두지 않으려는 이유는, 기존 설정한 카테고리를 신경 쓰다가 적는 내용이 국한될까 봐 그런 것도 있고, 이번 노트와 다음 노트의 내용이 같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카테고리가 생길 수도 있고, 분류를 새로 만드느라 한 번 더 골치를 썩혀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미래의 나에게, 새로운 항목이 생길 만큼 색다른 변화가 생긴다면, 오히려 좋은 일 일수도? 소름 끼치는 저성장 시대인만큼 가능한 모든 기대감을 끌어안으며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는 일상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