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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정 Aug 21. 2023

[5] 태초에 인턴이 있었다_동아일보

# 프롤로그


사실은 처음에 써야 하는 글을 난데없이 중간에 쓰게 되었다. 생각없이 앞만 보면서 달리다 뜻하지 않은 암초에 발이 걸렸다. 장애물을 만나고 나서야  출발점을 돌아보게 되었다. 너무 오래되어 흐릿해진 것 같지만, 기억을 더듬어 가다보며 또렷히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인턴시절은 내게 그런 출발점이자 기억이다. 


# 인턴기자도 시험을 본다


때는 2011년 여름. 나는 원래 준비했던 행정고시를 그만두고, 언론고시(!)를 준비중이었다.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한 나로서는 빨리 적성에 맞는 직장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 될 수 있는 시험에 매달리기 보다는, 취업시장에 얼른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스터디를 시작했다.(생각해보면 언론사도 문이 좁기는 하다. 그 당시에는 아주 조금 더 넓어 보였을 뿐) 몇 달간 작문이나 논술을 쓰고, 시사상식을 공부하다 맞은 여름방학. 소위 말하는 조중동의 인턴시험 공고가 올라왔다. PD를 준비하고 있어 논술보다는 작문을 주로 공부했기 때문에, 작문도 함께 볼 수 있는 동아일보에 원서를 냈다. 다행히 서류를 통과하고 시험을 보러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갔다. 교실에 들어가니 다들 노트북을 펼쳐놓고 열공 중이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시험시간을 기다리면서 굉장히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작문 시험의 주제는 한 사진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학교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혼자 떨어져 있는 빨간 구두(정확하지는 않음)가 인상적인 사진이었던 것 같다. 여튼 무엇인가 홀로 떨어져 있거나 버려져 있는 듯한 이미지의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을 보고 문득 영화 <연애의 목적>을 떠올렸다. 배우 강혜정과 박해일이 나온 영화였는데,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여러모로 씁쓸한 감정을 갖게 하는 내용이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연애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겪는 배신감, 따돌림 같은 감정들이 녹아 있는 영화였는데, 주제로 제시된 사진과 묘하게 내용이 겹친다는 생각이 들어 비슷한 내용의 작문을 완성해서 제출했다. (내가 쓴 내용이었지만,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따돌림을 주제로 한 픽션이었다는 것 정도만 생각난다)


얼떨결에 완성해서 낸 글은 필기를 통과했고, 나는 어느날 갑자기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장에 가자 또다른 긴장감이 밀려왔다. 정장이 따로 없어서, 졸업사진에 입었던 정장자켓(그것도 하얀색!)을 입은 채 면접을 봤다. 면접에는 3명 정도의 면접관이 있었고, 아마도 차장급이었던 것 같다. 기억나는 질문은 두 가지.


"로또 당첨자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여대를 다니는데 지금 시대에 여대가 필요한지?"


로또 당첨자에 대해서는 당첨금 주는 은행이 농협이니, 농협에 가서 (그 많은 돈을 담을) 큰 가방을 들고 오는 사람이 있는지 눈여겨보겠다는 정도의 답을 했다. 참고로 이 질문은 실제 상반기 실무 면접에서 지원자에게 냈던 과제라고 한다. 여대 폐지에 관련된 질문은 이제와서 학교가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취업을 해야되겠냐며 웃으며 운을 띄운뒤에 선교사가 세운 모교의 역사를 읊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이 질문은 나름 압박용이었던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분개한 내가 농담조로 질문을 받아치면서 그나마 잘 넘어갔던 것 같다. 그 외에 당일 1면 기사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를 했었다. 


# 내 이름을 걸린 글을 쓴다는 것


나름 어려웠던 면접을 잘 통과하고 나는 7주간의 인턴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첫 주는 스트레이트 기사 작성법과 7주 후 발표해야 하는 수료과제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그 이후로는 배치받은 부서에서 선배 기자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배치된 부서는 문화부와 정치부였다.


전반적인 인턴생활은 즐거웠다. 평상시에 만나보기 어려운 유명인들을 만나고, 가보기 힘든 곳을 가보는 시간들이었다. 기자는 기사만 안쓰면 너무 행복한(!) 직업이라는 말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걸그룹부터 소설가, 정치인, 영화감독 등 다양한 직업군을 만나 인터뷰하는 자리에 참석하고, 현장감있는 사건들을 취재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 정치부에서는 청와대와 국회 정론관에 출입하는 색다른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물론 청와대는 나중에 내가 출근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지만^^;)


문제는 내 이름을 걸린 글을 쓸 수 있는가 라는 문제였다. 매일 글을 써서 내기는 했지만, (경찰서 마와리도 돌아보지 않은) 인턴기자의 글이 기사로 실리기는 어려웠다. 실제 신문지면상에 바이라인(by-line : 신문ㆍ잡지 등에서 기자ㆍ작가 등의 이름을 밝힌 줄) 으로 실린 기사는 아래 두 개의 기사 였다. 


<첫번째 기사>

“편당 10만원 줄테니…” 파워북로거에도 유혹|동아일보 (donga.com)


<두번째 기사>

MB작년 8·15때 내건 ‘공정 사회’ 성적 매겨보니… 전문가 10인 “평균 C학점”|동아일보 (donga.com)


첫번째 기사는 지금으로 치면 '유튜브 뒷광고' 와 비슷하게 사례를 받고 책을 홍보해주는 북 블로거와 관련된 기사였다. 이 기사는 배치 받자 마자 작성했던 기사였다. 직접 파워 블로거들에게 전화나 메일 등으로 질문지를 보내고 서면 인터뷰를 한 후에 내용을 정리해서 선배기자에게 보냈다. 바이라인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당시 네이트 댓글에서 "인턴기자 이름은 왜 집어넣냐"는 반응이 베스트 댓글로 채택되어 있어 다소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했던 기사기도 했다. 또 당시 인터뷰했던 블로거 중 한 명이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카톡을 계속 보내는 바람에 결국 연락처를 차단했던 기억도 난다. 


두번째 기사는 공정한 사회 관련 국정과제 TF의 업무 성과에 대해 성적표를 매기는 형식의 기사였다. 역시 당시 몇 명의 교수들에게 관련된 전화 인터뷰를 하고 코멘트를 정리해서 선배에게 보냈던 기억이 난다.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하는 기사 였기에 정리하는 것이 비교적 간결하고 쉬워 보고 하기에도 어렵지 않았다. 


당시에는 왜 매일 글을 쓰라고 하고 글에 대한 코멘트까지 하면서, 실제 내 이름은 싣지 않는지 다소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만큼 그 불편함이 희석되기도 했고, 9년간의 회사 생활을 해보니 인턴에게 무엇인가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서로에게 무리였다. 취업 준비생 입장에서는 기자 체험 수준의 경험을 제공받고, 회사에서는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신선한 생각을 지면이나 당시 개국 준비 중이던 종편 채널에 활용하는 것이 적당했다고 본다. 


당시 나는 선배들에게 잘했다, 못했다, 별로이다 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나에게 별로라는 평가를 내렸던 선배 기자들은 본인의 기사를 쓰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기사의 레이아웃이나 문단의 흐름을 본인의 이름이 담긴 기사에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인상을 줬다. 이것 또한 회사에서 인턴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일종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이것 또한 당시에는 꽤 불편한 감정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불편함조차 시간과 함께 많이 희석되었다. 


# 기자가 되지 못한 이유


가장 중요한 지점에 왔다. 나는 왜 언론사 입사에 실패했을까. 또는 왜 포기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번째는 동력 부족. 나는 기자 또는 PD가 되고 싶다는 동력을 끝까지 끌고 가지 못했다. 당시 여름방학 동안 나는 인턴기자를 하면서, 학교에서 지원하는 PD 스쿨에도 참여하는 등 의욕적인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정해진 스케줄이 끝난 4학년 2학기부터 나는 동력을 잃었다. 졸업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학점만으로 학교생활을 했고, 논술이나 작문 스터디를 꾸준히 하긴 했지만 글을 써야하는 이유를 스스로 깨닫기가 어려웠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엔 조금 창의적이고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기엔 다소 딱딱했던 나는 어느 곳으로 방향추를 돌려야 할지 모르는 돛단배가 되어 있었다.


두번째는 실력 부족. 실력에는 여러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결정적으로 나는 나를 믿는 실력이 부족했다. 글을 잘쓰고 못쓰고, 토익점수가 몇 점인지를 떠나 나를 믿고 버티는 실력말이다. 당시 언론사 입사는 지하철 2호선과 같다는 말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돌다보면, 역마다 여러 대학들이 있는 것처럼, 열심히 돌고 돌다보면 어딘가에 입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많은 인턴 동기들은 신문사나 방송사에 시간차를 두고 입사했다. 만일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준비했더라면, 뜻을 이룰 수 있었을까. 아쉬움이 남지만, 이 시기의 실패와 포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실패와 포기를 떠나 어떤 '선택'이 내 길을 만들어 왔음을 알기에, 내가 나의 선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라도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 에필로그


언론인이 되는 것에는 미지근해졌지만, 나는 짧은 인턴 생활을 통해 조금이나마 언론의 매커니즘을 이해하게 되었다. 덕분에 좋은 언론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비판적으로 읽기는 가능한 독자는 되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포털로 쏟아지는 가운데, 그 쏟아지는 기사들 중에서 조금 더 나은 기사를 골라내는 능력을 조금이나마 갖춘 것에 감사하다. 이제 이 경험은 나의 두 번째 인턴경험으로 이어진다. 다음 글로는 지금은 누구에게나 공개된 청와대 인턴 경험을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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