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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정 Sep 10. 2023

[6] 태초에 인턴이 있었다_청와대 대통령실

- 라떼도 아니고 사골에 가까운 나의 인턴시절

# 프롤로그


얼떨결에 2011년의 인턴기자 시절을 소환해 글을 쓰고 나니, 세상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민망할 수 있는, 아니 민감할 수도 있는(^^) 시기를 한 번 더 소환해보고자 한다. 믿거나 말거나, 바로 청와대 대통령실 행정인턴 시기이다. 정확히는 홍보수석비서관실 모니터링팀 인턴으로 근무했던 경험이다. 2012년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부터 시작했던 약 3개월 간의 짧지만 강렬했던 기간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 청와대에서도 인턴을 뽑습니다


때는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마지막 학기였다. 8학기를 다니고도 취업을 하지 못한 무려 스물 일곱살의 나는어디라도 들어가야 했다. 8월 코스모스 졸업을 앞두고 매일같이 경력개발센터의 게시판을 들락날락하며 그 '어디라도'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맸다. 공고를 찾던 중, 눈에 번쩍 뜨였던 제목. 바로 청와대에서 행정인턴을 뽑는 다는 공고였다. 안내된 대로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자, 인턴 지원을 위한 게시글이 있었다. 간단한 자기 소개와 지원 동기 등의 내용을 기재하고, 몇 일이 지난 뒤 과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모니터링 팀을 지원했기 때문에, 과제 역시 뉴스를 모니터링하는 과제였다. 방송사의 9시 뉴스를 정말 9시 0분부터 받아서 쓰기 시작해, 9시50분쯤에 메일로 보내라는 과제였다. 속기사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반드시 어딘가에 출근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과제를 제출했다. 그리고 면접에서는 지금은 기억에 나지 않는 여러 질문을 받았고, 어찌어찌 답변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졸업식을 앞둔 8월, 나는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아 청와대로 출근했다.


# 새벽별과 함께 출근할 것인가, 달을 보며 퇴근할 것인가


당시 모니터링팀은 2교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매우 놀라웠는데, 아침조는 새벽 5시에 사무실에 도착해, 3시 정도에 퇴근을 했다. 그리고 오후조는 3시 정도에 출근해, 밤 11시~12시에 퇴근을 했다. 실로 놀라운 스케줄이다. 이 빡빡한 스케줄을 창안해낸  사람들은 모니터링 팀의 팀장과 선임들이었다. 대학에 늦게 입학한 나보다 선임들은 2살 정도 어렸는데, 이 스케줄에 이미 몸이 적응해 6개월 이상을 근무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스케줄은 아침 조간신문부터 아침 뉴스 및 YTN 뉴스, 중간중간 나오는 연합뉴스 속보, 저녁 뉴스, 시사프로그램까지를 모두 커버하기 위해 만든 스케줄이었다.


받아쓰기 과제에서 알 수 있듯이, 모니터링 팀의 일은 정말 받아쓰기 그 자체였다. 하도 받아서 정리해야 하는 기사들이 많다 보니, 나중에 나는 손목이 안좋아져서 근처의 국군수도병원에 가기도 했다. 손목 보호를 위한 받침대는 필수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약간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손목도 안좋고 타이핑도 느리고, 나이는 제일 많은데 일은 가장 못해서 이래저래 실수를 연발했다. 조간신문을 정리하고 나서는 신문의 기사들을 차례대로 정렬해서 뽑아 비서관 회의실에 정렬해야 하는데 이런 일 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어찌됐든 인간의 적응의 동물이고, 나는 작은 월급이라도 받는 것에 그저 감지덕지 하는 인턴이었기에 그럭저럭 이 험난한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 실수와 상처투성이의 시간에서 배운 것들


이미 십년이상의 시간이 흘렀기에, 자유롭게 그 시간을 회고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딱히 일을 잘해서 팀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어디에서도 이런 평가를 받아본적이 없었기에 나를 바라보는 약간의 애매한 시선들이 중간중간 상처가 되었다. 일 뿐만 아니라 팀과 홍보수석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화에도 적응이 어려웠다. 새벽 5시에 출근했는데 회식을 위해 저녁 11시까지 기다렸다가 사이다와 소주를 섞어서 마시고 비틀거리며 광화문에서 분당까지 오는 날도 있었고, 팀의 선임들, 동기들과 마찰을 일으켜 얼굴을 붉힌 사건들도 종종 있었다. 일의 강도는 말할 것도 없고, 관계에서 느끼는 소외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실수와 상처, 소외감 속에서도 나는 자라고 있었다. 어찌보면 사회생활은 내가 중심이 되지 못하고, 조직의 문화(그것이 비록 비합리적이다 할지라도)가 중심이 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과정에서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 마찰을 통해 나는 조직에 맞는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한 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맞출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불협화음을 통해 나는 나만의 음색을 내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던 것 같다.


업무적으로도 그 수많은 기사들을 시시각각에 따라 보는 요령을 익힐 수 있었다. 이때 워낙 많은 매체에서 기사들을 뽑아내다 보니, 취업 후에 기업의 위기관리(risk management)를 위해 기사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너무 높은 일의 강도를 짧은 시간 동안 요약적으로 겪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배우게 된 일의 요령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모니터링팀에서는 3개 정도의 모니터를 앞에 두고, 한꺼번에 몇 개의 신문을 보며 기사를 추려내고, 회의자료를 빠르게 만들어 아침 7시 수석보좌관 회의 테이블에 올려두어야 했다)


이 외에도 청와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산책했던 기억들(헬기가 내려오는 잔디 근처에 가면, 근처의 경호업무를 담당하시는 분들의 시선이 집중되기도 했다)이나, 맛있었던 구내식당 밥, 괴로운 날에 들렀던 작은 도서관에서의 시간들은 이제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한때는 나를 괴롭혔던 공간들이 지금은 추억의 소재가 되는 아이러니가 여기에도 있었다. 다음해 1월까지 예정되었던 인턴 시절은 11월 말, 내가 기업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 조금 빨리 끝을 맺었다.


# 에필로그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 게다가 조금 민감하게 기억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적절할까라는 고민을 많이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민감한 정치적 공간으로 청와대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 곳에는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스물 일곱살의 내가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일을 잘하고 싶지만 방법을 잘 몰랐고, 늦었다는 생각에 무엇이든 조바심을 내고 두려워했다. 그런 내가 어느덧 서른 여덟이 되어 그 시간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분초를 다투며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을 막상 모아놓고 보니 나른한 주말의 오후처럼 평온하게 느껴진다. 스물 일곱의 나는 몰랐겠지. 내가 그 시간을 무사히 통과해 온 것에 감사한다는 것을. 일도 관계도 심지어 이제 막 시작한 연애까지 삐걱거렸던 그 때가 그립기만 하다는 것을. 나는 그리워하기 위해 나의 지난 시간을 불러왔고, 그리워할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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