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썼어야 하는 글을 올해가 되어서야 쓴다. 나는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제조업 계열의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했다. 팀의 직무는 언론홍보, 브랜드 관리, 사회공헌, 사내(구성원 대상) 커뮤니케이션 4가지로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나는 약 7년간(육아휴직 기간 1년 3개월 제외)을 이 4가지 직무를 부분적으로 모두 경험했다. 모든 직무를 다 경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회사를 다녀보면 안다^^ 점심에 기자를 만났다가, 오후에 사보 기사를 정리하고, 그다음 날엔 바자회 행사에서 남은 물건을 떨이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실 이것도 거의 10여 년 전 일이 아니라, 지금은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본 사람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내일도 기자를 만나는 피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인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본다.
#기자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처음 신입사원 시절, 팀장님과 기자를 만나러 나가면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던 것 같다. 일단 회사의 업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를 못 하고 있어 자신이 없기도 했고, 팀장님과 함께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 불편함이 더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다양한 범위의 이야기를 상식적인 선에서 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일 경우에는 당연히 서로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해야 할 것이고, 이전에 산업부나 경제부가 아니라 다른 부서에 있다 이동해 온 분들에 대해서는 회사와 업황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쭉 훑어주면 된다. 홍보팀에 있으면서 총 3명의 팀장님을 겪었는데, 이 중 두 번째 팀장님이 이 회사 소개를 매우 기계적으로 잘하는 분이셨다. 정말 회사 홈페이지에 있는 그 연혁과 사업소개를 그대로 외워서 읊어주셨다. 너무 말주변이 없거나, 기자와 만난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의 동요가 크게 일어나는 분들은 이 방법을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별히 좋은 방법은 없지만, 흔히 말하는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는 무난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연도순으로 쭉 훑어서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도 잘 간다^^ (다만 이 정도 이야기를 하려면 회사의 연혁이 20년 이상은 되는 기업이어야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위의 스테레오 타입의 방법 외에도 자신과 공통분모(졸업한 학교, 고향, 관심사 등등) 이 있는 분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나 같은 경우에도 학교 후배인 분을 만났는데, 곧 결혼을 하셔서 작은 선물을 개인적으로 드린 적이 있다. 어찌 보면 기자 미팅은 매일 목적의식이 있는 소개팅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정보전달과 교환을 위한 분명한 만남이지만, 사람 사이의 만남이기에 통하는 사람과는 술술 이야기가 풀릴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고기 굽고 술 마시고 고기 권하고 술잔 채우다 사무실로 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나서 보면 둘 다 나쁘지 않다. 꼭 통하는 사람, 좋은 사람과의 만남만으로 내 커리어의 시간을 채워나가야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일단 한번 만나봐,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 이런 마음을 추천드립니다.
#어떤 기자들을 만났을까
사실 언론홍보를 전담으로 하지 않았고, 언론노출이 비교적 적은 제조업(석유화학) 계열의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다양한 스펙트럼의 기자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특히 신입사원 때에는 종합지보다는 특정 전문 매체의 기자 몇 명을 자주 만나는 편이었고, 그 당시 만났던 분들은 전반적으로 무난한 편에 속했던 것 같다. 업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서로 필요한 정보를 (홍보팀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주고받으며, 무리한 협찬을 요구하거나 특별히 까다롭지 않은. 이 정도면 평범하고 무난한 직장인으로서의 분들. 현재에도 같은 매체에서 꾸준히 일하고 계신 것으로 보아 성실하신 분들인 것도 맞다.
골치 아픈 기자들도 있었다. 특히 부장을 비롯해 총 3~4명의 기자들을 한꺼번에 팀장님과 만날 일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2013년에는 식당 내에서 금연이 필수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식당 내 금연 시행령이 막 시작된 때라, 흡연이 암암리에 허용되는 식당들이 있었다. 그날이 바로 그 흡연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먹는 소주는 그냥 먹는 소주도 아니었다. 아마도 몸에 좋다는 쓸개즙 같은 것을 넣어서 먹는 소주였던 것 같다. 평상시에도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지만, 도저히 마실 수 있는 비주얼이 아닌지라 사양하고 맥주를 마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 분들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오랜만에 드라이클리닝을 한 개나리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기자들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자, 나름 헤비 스모커였던 팀장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예의가 아닐 수는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나와 식당 앞의 카페에 가서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법인 카드로 주문했다. 내 트렌치코트를 위해서라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같으면 대놓고 담배를 나가서 피우시라고 면박을 주거나, 그냥 대강 넘기거나 뭐라도 쉽게 선택했을 텐데.. 사회 초년생한테는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 팀장이 몇 차례 교체되면서 다양한 기자들을 만났다. 젠틀한 분들도 있었고, 글 쓰는 일이 천직인 분들도 있었고,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앳된 대학생 같은 분도 있었다. 인상적인 분들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긴 분량을 할애해서 글을 썼지만, 만나서 배울만한 점이 있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내가 조금 양보한다는 생각으로 점심 메뉴를 고르고, 커피든 맥주든 함께 마시다 보면 충분히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 싶은 분들도 꽤 많았던 것 같다. 아마 그분들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을까. 그때는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기사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을까 라는 생각은 미쳐 하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나오고 싶지 않은 자리에 나온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을 수도 있고, 나름 하루를 가열차게 살고 있는 워킹맘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연락해 볼 만한 담당자로 기억해 주는 분이 계시지 않았을까. 그런 기대를 이제서야 품게 된다.
#에필로그
언론홍보가 나의 메인업무였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자료를 다양하게 써볼 기회는 많지 않았고, 기자 미팅에서도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를 드러내서 일할 기회가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도 그 자리를 생생하게 기억해 내고 글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매번 기자를 만나고 나면 기자미팅 기록을 써서 팀에 공유했는데, 당시 같은 팀이었던 과장님이 이 능력을 발견해 주셨다. 나는 왜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고, 말주변이 아주 뛰어나지도 않고, 회사 얘기도 자신감 있게 툭툭 던지지 못하는가.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를 드러내는 용기는 부족해도 나는 상황과 주변을 잘 관찰하고 기억해 내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그려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소위 말해, 무언가를 발견해 내는 촉이 발달한 사람. 그 촉수가 있었기에 내던져진 것 같았던 자리에서도 나를 잘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도 일에서 시작해본 글을 '나'라는 사람으로 끝맺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