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퇴사가 내게 선물한 나의 시간
# 프롤로그 : 기억의 탈주가 시작됐다
4번째 글이 시작되었다. 앞선 3개의 글을 통해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일들은 거의 털어냈다. 글을 쓰기 전 내 안에 억울하게 갇혀있었던 기억들이 활자화되며 자유를 찾아 떠난 느낌이다. 진작 자유를 찾았어야 하는 기억을 감옥 안에 가두어 놓고, 바깥으로 나가면 넌 다칠 수 있어 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기억들은 으름장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탈옥을 감행했다. 이렇게 나는 내 손을 떠난 글을 보면서 후련한 마음으로 과거에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수고했어. 이제는 진짜 나의 시간이야. 그렇게 4번째 글을 시작한다.
# 평가는 알파벳에 불과하다 : 2020년 1월~2020년 12월
2020년 초반, 나는 물론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대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IT 기획팀(이하 IT팀)으로 이동을 했고, 코로나19가 세상을 휩쓸었다. 대면 미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IT팀의 업무는 폭증했다. 임원에게 zoom 미팅 사용 방법을 안내하는 것은 기본이고, 생전 처음하는 여러 계약 업무와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홍보팀과 업무 성격이 너무 다른데다가, 새로운 업무를 코로나와 함께 맞이했기에 그저 혼란스럽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혼란도 잠시, 신입사원처럼 업무를 배우는 일에만 집중했다. 다른 업무이지만, 결국 같은 회사의 일을 한다는 점은 같다. 어느새 8년차에 접어든 회사원은 이 혼돈을 간단히 정리했다. 아마도 원하지 않는 팀 이동으로 인해 이미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고갈된 후였기에, 더 복잡한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승진이었다. 나는 어느새 대리 5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회사는 이미 기존 직급 체계를 폐지하고 매니저로 직급을 통일했지만, 여전히 승진이라는 관문은 있었다. 사원 3년과 대리 4~5년을 채우면 과장으로 승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홍보팀에서 대리로 승진한 후 4번의 평가 중 2번을 평가유예(M)로 받았다. 게다가 나머지 2번 역시 B를 받은 상황이었다. 회사에서 승진을 위해서는 최소 2개이상의 A가 필요했다. 따라서 2020년의 평가는 매우 중요했다. 팀 이동을 강요했던 실장도 승진에 유리하다는 것을 이동 사유로 꼽았다. 이제 막 승진한 과장 위주로 구성된 IT팀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승진기회를 빼앗길 이유가 없지만, 홍보팀에서는 1년 차이가 나는 후배와 경쟁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IT팀에서의 시간을 말하면서 왜 다시 홍보팀으로 시간을 돌릴 수 밖에 없을까. IT팀에게는 본의아니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홍보팀에서 회사생활의 대부분을 보냈고, 평가는 누적된 것이기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IT팀으로 이동이 확정된 후 2019년 인사평가 역시 B를 받았다. 이 평가는 팀 이동 사유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실장과 팀장은 내가 더이상 홍보팀에서 역량을 쌓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이 팀에서 업무를 확장해나가거나 깊이있게 파고들 여지가 없다. 또한 내가 더이상 필요하지도 않다. 당시의 내가 팀장과 실장과의 5번에 가까운 면담과 통보 끝에 내린 결론이다. 알파벳 B로 평가받은 것과는 무관하게 나는 여기서 크게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상사의 평가 외에 동료평가점수도 낮았다. 나를 끌어내리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 평가에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20년의 평가는 어땠을까. 당시 나는 승진할 의욕을 느끼지 못해 승진시험도 통과하지 못한 상태였고, 퇴사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런 고민과 무관하게 평가 시즌은 다시 다가왔다. 나는 A를 받았다. (팀의 선배들이 몰아준 평가였겠지만) 동료평가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팀장은 수고했고, 승진도 해야되니 열심히 하자는 피드백을 건넸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새삼 평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1년만에 대단한 업무 성과를 냈을 가능성은 없고, 동료들에게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도 없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가는 변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나의 모습일까. A도 B도 나의 모습은 아니다. 평가는 알파벳에 불과하다. 나는 그렇게 알파벳에 갇혀있던 시간에서 스스로 빠져나왔다.
# 나의 뜻이 아닌 첫번째 퇴사 : 2021년 7월
적응기였던 20년이 지나고 21년이 시작됐다.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나의 문제가 아닌 팀과 회사의 문제였다. 과거 정리해고가 그랬듯이, 회사가 다시 인력을 조정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회사는 이번엔 다른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다. 모회사의 인력을 자회사로 파견하여 인건비를 줄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IT팀이 대상이 되었다. 팀장을 제외한 팀원들이 인력팀에서 건넨 서류에 싸인을 하고, 각기 다른 회사로 가게 되었다. 21년 7월, 나의 첫번째 퇴사였다. 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팀에 헌신적이었던 선배들은 분노했다. 어찌보면 내가 홍보팀을 떠나오면서 느꼈던 실망감과 비슷한 종류가 아니었을까. 나와 가까운 것이 내게 실망을 주고, 상처를 준다. 내게는 홍보팀이 그랬고 선배들에게는 IT팀이 그랬다. 가까운 것들이 생채기를 내는 일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막 상처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 나의 계획대로 두번째 퇴사 : 2021년 10월
회사를 이동하고 나서는 더욱 정신없이 일을 처리했다. 2명의 선임이 퇴사하면서, 나머지 일들은 남은 사람들이 떠맡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팀이 굴러갈 수 있을까. IT팀에서 나는 신입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떠안을 수 있는 수준의 업무가 아니었고, 그럴만큼의 의지도 없었다. 그럭저럭 승진해서 적당한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 사는 것. 일에 애착을 가지지 않고 조금 떨어져서 대할 것. 이동하면서 어렵게 체득한 나의 태도로는 끌고 갈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추석쯤이었을까. 휴가를 내고 부산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한여름처럼 뜨겁게 달아올라있었다. 모래사장 위를 걷다가, 나는 불쑥 퇴사를 결심했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나의 뜻대로 두번째 퇴사를 결심했다.
팀장과 선배에게도 통보를 했다. 놀랍게도 선배 역시 퇴사를 결정했다. 하루아침에 두 명의 팀원을 잃은 팀장은 특별한 말이 없었다. 퇴사할 당시 마지막으로 직속 임원에게 인사를 했던 날이 기억난다. 임원은 갑자기 꿈이 있냐는 물음을 건넸다. 당시 그 질문이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뜻이었던 것 같다. 무슨 대단한 꿈이 있기에 이 좋은 회사를 떠나는지 이해가 안된다. 임원이 되면, 회사에서 제공받는 것이 너무 많아 꿈을 생각해볼 수가 없다. 그렇다. 잃을 것이 별로 없었던 나는 홀가분하게 회사를 떠났다. 임원을 뒤로 하고 사무실을 둘러보며 여기 있는 모든 이가 언젠가는 나처럼 홀가분히 이 곳을 떠날 수 있기를 기원했다.
# 퇴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2021년 10월~2023년 6월
퇴사 후 나는 정말 원하는 것만을 하고자 노력했다. 출근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것. 아이에게 아침을 챙겨주고 등원길을 함께 하는 것. 하고 싶었지만 휴가승인이 없으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했다. 많은 것을 느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은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서서히 사라지거나, 때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건들이 되어갔다. 점처럼 작아지는 사건들을 보며 나는 나를 힘들게 한 일들의 사소함을 생각했다. 당시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관통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 그 일들은 나를 스쳐지나가는 것들이었다. 지난 시간 회사에서의 나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기도 했고, 많이 부족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성실함과 모자람 모두 나를 온전히 담은 그릇은 아니었다. 나는 회사에서 담아낸 나의 그릇을 천천히 비우고 새로운 나의 시간을 감사함으로 빚어가고 있다.
# 에필로그 : 물론이지, 써도 된다. 무엇이든.
글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의문이 있었다. 과연 이 이야기를 써도 될까. 성취한 것은 별로 없고 오히려 잃은 것이 더 많아 보이는 이 시간들을 기록하는 것이 나에게, 또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이전에는 이 물음에 답하기 전까지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정답이라고 인정해줄 답을 찾아내지 못해 나는 나를 위한 글쓰기를 미뤄왔다. 쌓이고 쌓인 말들이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하고 나서야 결국 첫번째 글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써도 될까. 물론이지, 써도 된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기에 허락받지 못한 글을 내가 나에게 선물했다. 이제는 나에게 시작된 이 글이 누군가에게도 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