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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정 Jul 03. 2023

[2] 엄마의 인사고과는 평가유예

엄마의 시간은 왜 평가받을 수 없었을까

# 프롤로그 : 내 안의 파도는 이렇게 모래성을 밀어낼 수 있다 


첫번째 글을 쓴 이후, 내 마음에는 몇 번의 커다란 물결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첫 물결은 꼭 쓰고 싶었던 글을 써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이었다. 그 다음에는 잊고 지냈다고 믿었던 꽤 괴로운 시간을 다시 기억해낸 것에 대한 쓰라림이 밀려왔다. 기억하지 않고 묻어두는게 좋았을까. 라는 후회가 모래사장에 새겨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위를 다시 괜찮다. 라는 안도감의 파도가 쓸고 지나갔다. 파도가 몇 번 지나가자, 나의 후회는 물결과 함께 먼 바다로 떠내려갔다. 그렇다. 내 안에는 모래성처럼 쌓인 후회와 두려움을 먼 바다로 보낼수 있을 만큼의 힘을 지닌 파도가 있었다.몇 번의 파도가 지나간 후, 잠잠해진 내 마음 속 바다를 바라보며 두번째 글을 시작해본다.


# M(평가유예)의 시간 : 2016년 1월~2016년 7월


지난했던 신입사원 시기를 무사히 보내자, 통과의례처럼 승진을 했다. 사실 누구나 하는 승진이라 큰 감흥은 없었다. 다만 연말부터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1월 중순쯤 되었을까. 임신테스트기에 희미한 두 줄이 보였다. 병원을 가니 임신 5주차. 기대했던 임신이라 기뻤지만, 고민되는 일이 많았다. 당시 우리 팀에는 이미 임신 중기에 접어든 선배가 있었다. 워낙 팀원이 부족한 팀인지라, 임신했다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이와중에 다시 한 번 정리해고와 비슷한 느낌의 희망퇴직이 시작되었다. 희망퇴직은 본인의 희망보다는 회사의 희망에 가까운 절차였다. 팀원별 면담이 진행됐고, 팀장은 이번 기회에 퇴사하는 게 어떻냐는 질문을 던져 나를 당황하게 했다. 회사에 휘몰아치는 퇴직 바람을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임신 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쯤에서 잠깐, 내가 당시 담당했던 업무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명색이 회사생활을 정리하는 내용인데, 업무 내용이 없으니 섭섭할 수 있으니까.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규모가 있는 회사의 홍보팀 업무는 대략 4개로 간추려졌다. 언론, 브랜드, 사회공헌, 사내커뮤니케이션. 규모가 큰 회사는 이 업무가 하나의 팀이 되기도 한다. 내가 다닌 회사는 하나의 팀에서 4개의 업무를 나누어 담당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4가지 업무를 모두 골고루 경험했다. 신입사원 시기에는 주로 언론홍보를 담당했다. 하지만 교통사고 후에 복직하면서 언론을 주로 담당하는 팀장과의 마찰이 잦아지고, 팀 인원의 변동사항으로 인해 2016년 재직 당시에는 사내 커뮤니케이션 업무와 협찬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사내 커뮤니케이션은 사실상 사보 제작 업무가 전부였다. 인쇄가 필요한 종이 사보가 아닌 웹진 형태의 사보를 매월 제작했다. 기사를 매번 취합하고 부족한 내용을 메꾸고 마감이 밀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꽤 오래전이긴하지만, 반응형 웹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웹페이지 형식이라 간단한 HTML 문서 작업까지 했다. 한마디로 손이 많이 가지만, 성과를 보기는 어려운 업무였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업무 자체만 두고 보면 만족스러웠다.


엄마의 시간은 회사의 기준으로는 평가받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문제는 업무의 성격보다는 업무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었다. 저평가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도 저평가 받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 휴직 후 업무에 대한 평가 역시 A나 B가 아니라, M(평가유예)였다. 잘했다, 중간이다, 못했다가 아니라, 평가를 유예한다. 임신 30주까지 분당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하며 8시간씩 일을 해도 평가는 없었다. 왜 평가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없었다. 세번째 글에서 이어지겠지만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 자신조차도 나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어려웠던 시작이. 


# 더운 여름날, 예비엄마의 시간 : 2016년 8월~2016년 9월


더운 여름날 퇴근길이었다. 유난히 아랫배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지하철에서 내릴때부터는 걷기 조차 힘들었다. 심한 통증으로 저녁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결국 응급실에 내원했다. 검사 결과, 조산기가 있으니 일단 입원하라는 진단을 받았다. 임신 기간 내내 출산휴가를 언제쓸지 고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30주에 휴가를 냈다. 팀장에게는 문자로 몸이 안좋아 내일부터 출근할 수 없다고 보냈다. 뜻하지 않은 입원으로 나는 긴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집 앞 도서관을 가고 틈틈히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업무 인수인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로 휴직을 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나보다 더 야무진 후배가 내 일을 잘 맡아주었다. 꿀처럼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잘 보내고, 조산기가 온 것이 무색하게 40주 3일이 되어서야 3.7kg의 우량아 아들을 순산했다.


# 아이과 함께한 사계절의 휴직 : 2016년 9월~2017년 10월 

 

출산 후 시간은 엄마로서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서 시간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사실 이 시간을 회사생활을 정리하는 글에 넣는 것이 맞을지 고민했다. 회사에서는, 외부에서는 이 시간을 업무를 하지 않는 휴직의 시간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일하지 않은 시간에도 일에 대한 고민은 이어진다. 앞으로 계속 일을 하는게 맞을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지, 뾰족한 답은 없지만 지나온 내 시간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당시에는 아기가 너무 어려 고민할 시간이나 여력이 없어 답답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시간동안 나는 회복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돌봄을 위해 빼곡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고민끝에 내 안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이가 날 회복시키고 내게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었음을 이제는 안다.


복직으로 마음이 기울어가던 여름,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희망퇴직으로 퇴사한 팀장의 빈 자리에 새로운 팀장이 왔다는 소식이었다. 나 역시 복직을 하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얘기했다. 다행히 친정엄마와 시어머님께서 아기를 번갈아 가며 돌봐주시기로 했다. 친정과 같은 단지의 아파트로 이사도 완료했다.13개월의 아기이지만, 아장아장 걸음마로 어린이집도 등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구분과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냥 엄마의 시간에서 일하는 엄마의 시간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 에필로그 : 엄마가 된 나를 인정해주기

 

대리가 되자마자, 엄마가 되었다. 한 문장으로 정리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못버틸 것 같았던 시간을 잘 이겨냈다. 회사에서는 성과로 평가받을 수 없는 성장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회사 안에 머물러 있을때는, 회사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했다. 그래서 나 자신도 휴직중인 나에 대해 평가를 유예해왔다. 일을 하지않았기 때문에 평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 밖으로 나와서야 회사 안에 있었지만 평가받지 못했던 시간을 인정하게 됐다. 엄마가 된 나를 인정해주기. 두번째 글이 내게 뜻하지 못한 선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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