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이슬아 작가의 1호 책, 헤엄 출판사 1호 작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받아 들던 날, 나는 책의 두께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랬다.
이게 수필집이라고?
웬만한 단행복 2권 분량의 수필집을, 나는 법전을 대하는 심정으로 펼쳤다. 이 책은 무려 568페이지 분량이고, 이슬아가 2018년 3월에서 9월까지 연재한 106편의 수필 중 85편이 수록되었다.
좀 엄선해도 될 텐데, 그녀는 왜 이렇게 이빠이 꽉꽉 채워서 책을 펼치기도 전에 질리게 만들지?
나는 그 궁금증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작가가 자신의 모든 글에 흡족하여 내린 결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 너무 궁금해서, 책의 뒤편 출판정보에 등록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싶었다.
이 책에는 그녀의 핸드폰 번호가 등록되어 있는데,
2호 작 [심신단련]에는 이에 관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연락처를 필수로 입력해야만 출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당시 자기 집에서 1인 독립출판을 한 이슬아는 어쩔 수 없이 본인의 핸드폰 번호를 등록한 것이다. 어떤 아줌마 독자가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와서 작가에게 행한 무례함이 기억나기도 하거니와, 설마 이 번호를 아직까지 사용할까, 의구심이 들어 전화를 걸고 싶은 욕구는 내려놓았다. 미친 척하고 문자라도 남겨볼걸 그랬나?
106편 중에 85편만 수록한 것은, 나머지 작품들이 지인들의 글이라 저작권 문제 때문에 수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일간 연재를 하며 지인들의 좋은 글을 선별하여 구독자들에게 발송했는데, 누구보다 이슬아는 그들의 글도 함께 소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이 책은 더욱 뚱보가 되었겠지.
처음엔 책 두께에 지레 질렸지만, 나는 568페이지 끝까지, 단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그것은 고행이 아니라 기꺼운 즐거움이었다.
그녀의 글은 확실히 읽는 재미가 있다. 어떤 구독자들은 메일로 혹평과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지만 나는 85편의 수필이 모두 좋았다.
나로서는 지인들의 수필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슬아는 학자금 대출 2500만 원을 갚기 위해 일간 연재를 시작했다. 스스로 포스터를 만들어서, 어떤 매체도, 어떤 플랫폼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SNS를 활용하여 구독자를 모았고 6개월 만에 대출을 다 갚았다고 했다. 나는 포스터에 쓰인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
"아무도 안 청탁했지만 쓴다!"
내가 이슬아에게 매료된 지점은, 스스로 매체를 만들어 버리는 혁신과 실행력이다.
"슬아 앞에서는 계획에 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슬아가 알면 바로 실행이 되니까"
그녀의 남친이 이런 말을 할 만도 하다.
자기 글을 편당 500원에 독자들과 직거래 한다는 발상도 신박하지만, 글을 매일 써낸 그 악력과 지구력은 진심 대단하다.
물론 "돈"이 결부되어 있고 자기가 벌인 짓이니까 당연한 약속이다. 내 말인즉슨, 나는 한편에 만원씩 쳐줬어도 매일 쓰는 행위는 시작도 못했을 거라는 거다. 거기에 '돈'이 결부되어 있다면 그건 내게 불지옥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어딘가에 고용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매불망 청탁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 직거래 방식으로 독립적인 작가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하루의 루틴과 체력 관리에도 소홀함이 없는 그녀의 바지런함도 게으른 나에겐 그저 감탄이다. 스스로 성실한 글쓰기 노동자라고 말하는 그녀는, 동시에 성실한 생활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슬아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주 5일 연재가 다소 버거워서 꾀를 낸 것이기도 하겠으나, 그녀는 어쨌든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인들의 주옥같은 글을 함께 발행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지인들의 글이 더욱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슬아는 메일링 서비스라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매체를, 무명인 동료 작가들의 플랫폼으로 영역을 확장시켜 버린 것이다. 자기만의 밥그릇에서 그치지 않고 상생을 도모하는 그녀에게서는 유능한 사업가의 면모도 느껴진다. 자기는 한편에 500원씩 받으면서, 지인들에게는 원고지 1매당 만원씩의 원고료를 즉각적으로 입금해주면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주근깨 조차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 수필집에 언급된 그녀의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도 그녀의 가공된 글쓰기를 거쳐 너무나 매혹적인 캐릭터로 팔딱거린다. 특히 나는 작가의 아빠 웅이와, 작가의 엄마 복희를 한 번은 꼭 만나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딸과 맞담배를 피우고 딸의 노브라를 지지하는 아빠 웅이, 컴퓨터가 꺼져 있는데 어떻게 이메일이 들어오냐고 반문하는 엄마 복희.
산업잠수사를 포함해 안 해본 일이 없는 웅이와,
음식을 끼깔나게 잘 만드는 복희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월세와 빚에 허덕일 때
세상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분노감이 용솟음치기도 했다.
85편의 수필 중 내가 이 책에서 단연 최고로 꼽는 글은 [ 마담과 다이버 ] 다.
웅이가 산업잠수사로 앙골라에 파견을 가고, 복희는 남편 웅이를 따라 잠수사들의 밥을 해주기 위해 동행한다.
나는 이슬아의 글을 통해서 처음으로 '산업잠수사'라는 직업을 접했는데,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건설현장의 노가다를 물속에서 하는 거라고 했다. 물속에서 용접까지 해내는 산업잠수사들이 나는 몹시 섹시하게 느껴진다.
척박하고 열악한 아프리카에 파견된 산업잠수사들이 복희가 차려낸 음식에 환호할 때, 나는 덩달아서 기쁨이 차올랐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복희와 밍의 우정이 나는 참으로 인상적 이었다.
복희 보다 앞서 직원 숙소의 가정부로 일하고 있던 베트남 여성 '밍'과 복희의 바디랭귀지에 배꼽 잡으며 낄낄 거리다가, 3개월 뒤 한국으로 귀국하는 복희를 잡고 밍이 펑펑 울 때, 내 가슴 한켠도 허해졌다. 2부작에 걸친 이 글은, 수필이라기 보다는 한 편의 완성된 단편소설처럼 따뜻하고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웅이와 복희가 귀국하고도 아주 오랫동안 그 척박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왜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여전히 빚과 월세를 벗어날 수 없는지 이해되었다.
그건 결단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이 게으르게 살아서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그녀의 지인 10명이 쓴 추천사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낯익은 유명인 요조 뿐만 아니라 그녀의 수필에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친구들의 추천사는 생경하면서도 상콤했다. 이슬아의 남친 하마가 추천사를 만화로 대신한 것도 재기 발랄하다.
어릴 적 상점에서 가방을 훔친 자신의 치부 조차도 기어이 끄집어내는 이슬아의 솔직한 화법, 거침이 없는 표현력과 문장의 소구력에 나는 앞으로 한동안 그녀의 글에서 허우적댈 것 같다.
다재다능한 그녀가 성실한 글쓰기로 월세 탈출의 소망을 이루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그저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고된 노동일지라도
항불안제로부터 벗어나 그녀가 행복하면 좋겠다.
이건 레알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