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화요일에 작가 신청을 했고 다음날 바로 승인 메일이 왔다. 사실 데모로 제출한 글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흡족하지 않아서 반신반의 했다. 게다가 직장 PC에서 개인 이메일 접속이 안되기 때문에 나는 승인 메일 자체를 금요일 저녁에나 확인했다.
승인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며 나는 혼자 양가감정에 빠졌다. 시간적 여유도 없는데 괜한 짓을 벌렸으니 승인이 안되면 차라리 잘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승인이 안되면 한편으로는 열나 기분이 나쁠 것 같았으니 말이다.
얼마 전 읽은 정혜윤의 [퇴사는 여행]에서 브런치를 처음 알았다. 브런치는 카카오에서 제공하는 콘텐츠 퍼블리싱 플랫폼이다. 정혜윤 작가도 브런치에서 글을 쓰다 책까지 출간했다.
실제로 브런치에는 이미 책을 출간한 기존 작가들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듯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글쓰기가 주류로 보인다. 그들의 욕망은 작가 지망생이거나,
혹은 책 출판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되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글을 쓰며 사유해야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처럼.
나는 여기에 모여들여 열심히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왜 이렇게 글을 쓰려고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이 열심히 봐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또 이 대열에 왜 합류하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이 있다.
책은 지식만 얻는 매체가 아니라 인류애를 확장시키는 결정적 도구이다. 글 쓰는 행위는 끊임없는 자기 점검, 자기 검열이다. 그런 사람들이 좀처럼 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곳에서 부여하는 ‘작가’라는 호칭도 마음에 든다.
블로거라는 호칭 대신 작가라는 호칭으로 대체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에서 나의 글을 쓰는 행위가 한결 더 존중받고 대우받는 느낌을 받는다. 브런치에서는 실제로 매우 적극적으로 책 출판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예비 작가로 인정하는 게 타당하기도 하거니와, 전략적으로도 굉장히 영리하다.
희망고문이 아니라 실제로 희망의 증거들을 보여준다.
솔직히 요즘같이 독립출판이 난립하는 시대에 사실 뭐 마음만 먹으면 책 한 권 출간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나. 최근에 팬이 된 이슬아 수필가도 등단 작가가 아니라 독립출판으로 시작했고, 10권의 책을 내면서 당당하게 작가의 위치를 확립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도 자신이 등단작가 출신이 아니라는 걸 아쉬워 하지만 등단작가 만이 권위를 인정받는 시대도 아니다. 몇 년 사이에 책을 10권이나 냈다는 것은 그만큼 필력이 입증된 것이다. 고로 나는,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모든 예비 작가들을 가열하게 응원하고 싶다.
사실 플랫폼에서의 글쓰기가 처음은 아니다.
삼십 대 초반 파릇한 젊은 엄마 시절에 나름 글을 쓰며 활보했던 한 시절도 있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대형 포털 사이트가 없던 인터넷 초창기에는 다양한 군소 사이트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당시 전업주부였던 나는 아줌마닷컴과 사이버 주부대학이라는 곳에 똬리를 틀고 전국의 아줌마들과 소통을 했다.
나의 글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주목을 받았고 그 안에서 일종의 팬덤이 형성되었는데, 심지어 나는 “대체 어떤 년이 글케 글을
잘 쓴다는 게야?”라는 험한 시기를 받기도 했다. 나의 글에 대한 애정과 질투를 동시에 가진 인터넷 친구와의 특별한 인연도 그때 맺어졌다.
양 사이트의 러브콜을 받고 두 군데서 모두 독자적인 글방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곳에서 한동안 짧은 소설을 올리며 내 글에 반응해주는 사람들을 신기해했던 시절은 분명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그 후 나는 너무 오랫동안 삶의 풍파에 찌들었고 책도, 글쓰기와도 멀어졌다. 인생은 결코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나는 다시 나의 본성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지금 나의 글쓰기는 한가로운 취미도 아니고 여유가 넘치는 즐거움도 아니다. 갱년기를 맞으며 인생은 공허하고 삶은 더없이 지루하다. 지금 내게 글쓰기는 일종의 생존인 것이다.
브런치에서 작가 신청을 하며, 오래 묵은 글쓰기의 욕망이 이곳에서 포텐 터지길 소망한다고 썼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진심은 아니다. 나는 그저 읽고 쓰며 나라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은 바람으로 오래오래 연명의 글쓰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