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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Apr 24. 2022

나는 직업상담사입니다

나는 중앙부처 근무 7년 차 무기계약직 직업상담사이다.

2015년 9월, 내 나이 마흔다섯에 43대 1의 경쟁률을 뚫느라 피똥 좀 쌌기 때문에 여기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아니 나가라고 해도 못 나간다는 자세로 철썩 들러붙어서 오늘도 실직자들과 울고 웃는다.


구성작가, 공인중개사, 바텐더, 보험설계사, 호프집 사장님에 이어 직업상담사는 나의 여섯 번째 직업이다. 직업상담사가 된 것은 마흔 살에 아주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된 심리학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동업으로 호프집을 오픈하고 1년도 안되어 말아먹고 이제 뭐해 먹고살아야 하나 막막할 때,

정부 산하기관의 심리상담사 2급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진로코칭 지도자 자격증도 같이 준다길래 막연하지만 재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신청을 했다.  경력단절 여성들을 대상으로 모집이 이루어졌는데, 쉽게 말해서 백수 아줌마들 여기 모여라 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 백수 아줌마들을 위한 프로그램에도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되었다는 걸 말이다.


경쟁률이란 게 참 사람을 간사하게 한다.

별것 아닌데도 네 명을 물리치고 내가 뽑혔다니 기분이 으쓱했다. 하물며 43대 1의 경쟁률은 말해 뭣하랴.  나의 공채 합격률은 유구손손 유일한 부심이다.  가령 직장에서 뭔가 부당한 상황이 발생하여 공개 게시판에서 저격을 할 때도 나의 발언은 으레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저는 4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상담원으로 입사한 아무개입니다."


즉슨, 이런 인재들을 함부로 대하시면 안 된다는 무언의 선언이 깔려 있는 것이다. 오십이 넘은 내가 내세울 거라곤 운전면허증을 포함한 국가자격증 3개와, 내 나이 마흔다섯에 성취한 공채 합격인 것이다.


어쨌든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뭔지 관심도 없었던 나는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심리학과 조우했다. 나의 인생은 40대 전과 후가 아니라, 심리학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그것은 임팩트 있는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2개월간의 커리큘럼과 강사진이 우수했고, 열혈 아줌마들의 높은 학구열까지 삼박자를 완벽히 갖추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그녀들과 스터디 모임을 유지하며 1년간 마음공부를 했다. 그 과정에서 뒤늦게 상담 대학원에 진학한 이도 있고, 나는 이렇게 직업상담사가 되었다.


사실 심리상담 분야는 직업으로 연결되기가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대학원을 나와야 하고, 대학원을 나와도 자원봉사 다니는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2천만 원 이상의 대학원 학비를 감당할 여력도 없었지만, 기회비용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한 것은 지독히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선택이었다. 나처럼 혼자 맨땅에 헤딩하며 길 찾기 할 때, 누군가 적절한 조언과 나침반이 되어 준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선택은 지금 현직에서 완벽히 주효했다. 나의 직업적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10점!


갈 길 모르고 헤매는 이들에게 적절한 진로를 찾아주고,  직업상담과 심리상담의 경계에서 정서적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오늘도 나는 실직자들과 밀당을 한다. 나의 미약한 재능이 누군가에게는 빛과 소금이 되길 오늘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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