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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Feb 21. 2023

진짜 선임이 되겠습니다.

2021년 1월 1일에 시행된 국민취업지원제도 출범을 6개월 앞두고, 나는 소장님에게 강력하게 보직변경을 요청했다. 햇수로 3년 동안 혼자서 구인구직업무를 전담하며 센터의 실적을 이끌었던 나는 매너리즘이 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투입되겠다는 니드가 훨씬 더 강했다.


그런 나를 동료들은 모두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중앙부처에서 어떤 새로운 사업이 도입 시행된다는 것은, 사업 초창기에 엄청나게 빡센 업무량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5급 사무관인 지협 과장님은 심지어 내게 도전정신이 있다고까지 운운하셨는데, 사실 내가 주변의 이런 시선들에도 자발적으로 보직 변경을 희망한 것은 도전정신 때문도 뭣도 아니다.


나는 그저 어떤 것의 시작을 처음부터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건 다시 말하면, 적어도 그 업무에 있어서 내 위에 선임이 있을 수 없고, 나 자신이 선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나는 스스로가 선임이 되어 업무적으로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


2015년에 입사하여 이미 수년간 진행된 취업성공패키지 사업에 투입되었을 때, 나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선임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신입이라고 봐주는 이 없는 이 조직에서는 첫 출근과 동시에 120명이 넘는 구직자가 내 앞으로 떨어졌고, 프로그램 진행 단계도 120명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따라서 나는 업무 자체를 알파벳 순서대로 찬찬히 배울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닥치는 상황을 그때그때 수습하고 처리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익힐 수밖에 없었다.


업무매뉴얼을 꼼꼼히 정독해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이해하는 데는 실무경험 6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러니 6개월간 신입인 내가 많은 구직자들의 다양한 요구사항들을 처리하려면 선임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처의 사업이란 두꺼운 매뉴얼 한 권으로 완벽한 업무처리가 불가능하다. 매뉴얼은 말 그대로 뼈대를 제공할 뿐, 그 사이사이로 너무나 다양한 케이스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내 업무별 커뮤니티에 방대한 질의응답 자료가 올라가 있지만, 취업성공패키지 업무를 수행하던 당시의 나는 커뮤니티에도 거의 접속하지 않았다. 선임들에게 즉시즉시 물어봐서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이 오히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민원인들의 속성 자체가 빠른 답변을 원하기도 하거니와, 내일 개강하는 직업훈련을 오늘 퇴근 직전에 요청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돈을 지급하는 것과 연관되면 더더욱이나 답변의 신속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때 나의 선임들은 대부분 친절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친절한 선임에게만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녀가 상담 중이거나 자리에 없으면 시급한 나는 누구에게든 달려가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무렵 마흔다섯 살 신입에게 업무를 가르치느라 선임들도 고생했겠지만, 나 역시도 그 상황들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묻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꽤나 종종거렸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업이 시작된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직원들이 기피할 때, 오히려 긍정적인 관점으로 자진해서 뛰어 들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업무에 관해서는 모두가 제로 베이스가 된다는 게 나는 좋았다.



2021년 새해가 밝고, 역시나 예상대로 엄청난 업무량에 뒷목 잡고 일을 했다. 한 시간 단위로 상담을 소화하고 야근을 하면서까지 업무를 꼼꼼히, 철두철미하게 숙지했다.  두꺼운 업무매뉴얼을 3회에 걸쳐  정독하고, 사내 커뮤니티 게시판에 매일 6,7페이지 이상  쏟아지는 전국 동료들의 질의와 본부 답변을 단 한 개도 빠지지 않고 읽으며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동료들은 우스갯소리로 사법시험을 준비하냐고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커뮤니티 게시판을 빠짐없이 정독하다 보니 많은 직원들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올리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이들이 나처럼 게시판을 정독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궁금한 것만 올리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살인적인 업무량에서 커뮤니티까지 그렇게 정독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문제는 반복되는 질문들 중에는 너무나 단순해서 어이없는 내용들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 눈에도 반복적인 답변을 달아야 하는 본부 직원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어느 순간, 나는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질문들에 대신 답변을 달기 시작했다.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서 내가 정확히 숙지하고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답변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본부에서는  커피쿠폰을 제공하며 서로서로 답변을 공유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는 3개월 연속 3만 원짜리 커피쿠폰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는데, 이런 보상 시스템은 결국 3개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커피쿠폰을 나 혼자 계속 받았기 때문이다. 즉, 그런 보상 기제에도 답변을 열심히 공유하는 건 나 혼자였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공공기관 종사자들의 특성 때문에 나타난다. 답변을 단다는 것은 일종의 책임 소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부담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 역시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나는 열심히 답변을 달았고 지금도 달고 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재밌는 현상이 벌어졌다. 전국의 동료들이 메신저로, 혹은 전화로, 이메일로 나에게 다양한 업무 관련 문의를 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건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다. 국민취업지원제도 업무 만 2년이 지난 요즘은 "본부 답변보다 슨생님의 답변이 더 믿음이 가요"라고 말하시는 분도 생겨났다.


나는 비교적 명확하고 확실한 어조의 답변을 달아준다. "이렇게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보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라는 답변은 상대방에게 훨씬 더 신뢰감을 준다. 상담사의 재량적 판단의 여지가 있는 케이스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민원인의 이익에 부합한 조언을 건넨다.  게시판이 아니라 메신저로 문의하시는 분들의 경우는 대부분 민원이 발생하기 직전의 다급한 경우들이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나는 조목조목 대처방법을 조언해 드린다.  구직자의 허점이 있다면 명확하게 짚어드리고 안 되는 건 안된다고 단호하게 대처하시도록 답변을 한다.


 "신문고 민원 넣는다고 방방 뛰시는데 그러면 조직생활이 힘들어질까요?ㅠㅠ"

심지어 이렇게 나이브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 물론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답변이 아니라 응원이다. 조직생활에 아무 문제없으니 당당하게 대응하시라고 푸시한다. 우리가 원칙대로 업무처리를 했다면 그들이 신문고 민원을 넣든 행정심판을 제기하든 하등 문제될 것이 없으니, 오히려 민원인에게  신문고 넣으시고, 필요하면 행정심판도 제기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안내해 주시도록 조언한다. 물론 이런 경우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답변은, 민원이 날 뻔했던 상황을 말끔히 정리해 주었을 때지만 말이다.


작년 11월 초, 3박 4일짜리 연수원 교육에 참여했을 때, 나는 내가 전국구 스타였다는 걸 알았다.

"커뮤니티에 답글 잘 달아주시는 분이 내 앞에 있다니, 연예인 만난 기분이에요. 저도 선생님의 정성스러운 답메일 받은 사람입니다."

고양시에서 오신 동료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서 사레가 들릴 뻔했다.


나는 2년 만에 재개된 집체교육에서 만난

분들에게서 이런 인사를 받았다.

"어떤 분인지 뵙고 싶었어요."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물론 이 무렵 나는 사내 게시판에 거침없는 발언을 올려서 후폭풍이 상당했던 상태였기 때문에 연수원에서 만난 분들의 인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2년간 꾸준히 업무적인 지식과 의견을 공유한 영향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만 2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누군가는 아주 초보적인 질문을 보내오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내 시간을 뺐는 것에 대해 늘 조심스럽고 미안해한다. 괜찮아요, 언제든지 메신저 주세요. 제가 아는 건 답변드릴게요. 그들이 불편하지 않게 배려한다.


나는 자기 주도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싶어서 신사업에 자진했고 그 목표는 100프로 달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 선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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