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회사 동료들은 퀵으로 꽃다발을 보내주었고, 나는 도대체 그 꽃다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바라보다가, 꽃병에 꽂아 사무실에 4일 정도 그대로 두었다.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이번 여름은 견딜 수 없이 무더웠다. 중환자실의 15분 면회를 위해 매일 5시간 왕복을 하며 이동했던 날들... 호흡기를 연결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 엄마의 얼굴, 나를 볼 때마다 엄마의 눈동자에 차오르는 눈물, 그 눈물을 보면서도 예쁘게 웃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아빠의 분노를 받아내는 것, 모두가 견딜 수 없이 버거웠지만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텅 빈 눈으로 한국에서 두 달을 보냈다.
엄마의 장을 도려내는 큰 수술이 끝나자, 의사는 마스크를 쓰고 계속 설명을 하면서도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나를 저렇게 바라보는 걸까? 수술은 잘 끝났지만요. 하고 의사는 엄마의 잘라낸 소장을 수술실 초록색 천에 감싸 보여주었다. 이걸 왜 보여주는 걸까? 아마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다는 의사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여름 내내 의사는 별 말이 없었다. 수술이 필요하다, 아니면 콧줄을 연결해야 한다,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한다- 라는 정도였다. 아빠는 병원 창구에서 검사지를 떼었고, 그 검사지는 암호같은 말들만 가득했다. 그대로 AI로 쳐서 설명을 부탁했더니, 엄마의 심장, 위, 소장, 신장, 림프절이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 한꺼번에 무너진다는 뜻이었다.
엄마를 살려달라고 담당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하루 전이었다. 의사를 만나지 못할까 봐 내내 로비에서 몇시간동안 기다리다가 결국 외래진료실에 가서 간호사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중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오늘은 진료 안 오시는데... 아마 의사가 그 편지를 받은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을 것이다.
오늘 밤이 고비일 거라는 전화를 받고 아빠는 고속도로 차 안에서 오열했다. 난 그 순간에도 아빠가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우리가 다 죽어버릴까 봐 정신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나도 펑펑 울거나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생존이 더 급했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순간은 참 이상했다. 우리는 엄마의 침대 곁에 둘러앉아 사랑해, 고마워 따위의 말을 반복해서 하고, 인공호흡기에 연결된 엄마의 폐는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바이탈 기계가 띠-띠-띠 하는 소리를 멈추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느 순간에 엄마가 돌아가셨는지는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어떤 입자들이 사아아- 하고 퍼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싶어서 그 입자들이 내 몸에 다 흡수되도록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 그 순간 엄마가 떠나신 게 아닐까 싶다. 새벽 2시쯤이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탔다. 엄마의 몸은 시트에 쌓인 채 묶여 있었고 에어컨을 최대로 켜서 차 안이 너무 추웠다. 그렇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새벽의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 고속도로 터널의 노란 불빛과 앰뷸런스의 초록색 조명, 차가운 공기, 딱딱하고 작은 의자와 흰색 시트. 시간이 지나도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이 순간은 내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
그때까지도 어떤 멍하고 흐릿하고 이상한 기분에 둘러쌓여 있다가,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집에 온 순간에야 큰 충격이 느껴졌다. 아아, 그건 정말 커다란 구멍이었다. 등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너무 아팠다. 그런데 그 구멍은 내 몸보다 커서, 내 갈비뼈와 목, 머리 전부가 텅 비고 나는 하체만 남은 것처럼 걸어다녔다. 시린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공백 그 자체였다.
장례까지 모두 치르고 나는 상담사를 만났다. 봄에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부터 나는 죽음을 예감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회사에서도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보다못한 내 상사가 나를 끌고 상담사 사무실 앞으로 데리고 갔다. 정해진 세션이 끝났지만 엄마의 장례식 얘기를 듣자 상담사 클레망스가 자기 시간을 더 내어 나를 상담해 주었다.
- 클레망스, 제가 제일 견딜 수 없는 건 엄마가 아무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갔다는 거예요. 제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엄마는 말을 할 수 없었거든요.
- 그랬군요.
- 보통 유언 정도는 듣잖아요? 저한테는 아무 메시지도 없었어요. 난 아무것도 없다구요.
- 무슨 메시지가 듣고 싶었어요?
- 모르겠어요. 그냥 일상적인 거요. 잔소리나... 엄마는 저한테 입술을 붉게 칠하라고 했고, 웃으라고 했고요. 그런데 잘 기억이 안 나요. 엄마가 보통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 * *
나는 배가 고팠다. 드러그스토어에 가서 아기 간식을 샀다. 내가 이유식을 시작할 때쯤 우유도 이유식도 거부하고 아기 간식인 거버스만 먹었다고 한다.
잡채는 다시는 못 만들 것이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식사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2년 전 휴가때 한국에 놀러갔고, 그때도 엄마는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너한테 뭘 좀 먹여야 하는데..." 하고 내게 한국 음식을 먹이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엄마. 신장 때문에 식단관리를 해야 하는 엄마를 위해 레시피를 보고 저염 잡채를 만들었다.
그때도 무슨 일인지 아빠가 자꾸 화를 냈다. 나는 당면을 끓이다가 아빠의 화를 달래주러 갔고, 그 바람에 당면이 퉁퉁 불어버렸다. 야채를 넣고 잡채를 만들어봐도 엄마가 만들어주는 그 맛이 안 나서 나는 또 화가 났다. 너무나도 화가 나서 냄비채로 잡채를 버리려다가 부엌 한켠에 덜렁 던져버렸다.
엄마는 아픈 몸을 비척거리며 일어나 그 냄비에 참기름이며 간장을 더 넣었다.
-먹을 만 하네.
울면서 먹은 그 잡채가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일 줄은 정말 몰랐다.
* * *
나는 엄마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사실 클레망스가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까지도 나는 설마, 그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까뮈의 이방인을 읽었고, 그 책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르겠다.(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문장이 이해가 가다니.
그 후에는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을 읽었다. 엄마를 잃고 난 뒤 한국음식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나는 그 책을 서점에서 펼쳐보고는 엉엉 울었다.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어느 5월의 주말에는 튤립 축제를 보러 갔다. 날이 너무 뜨거워서인지 튤립이 다 죽어있었다. 어째서 다 시들었을까. 예쁜 구경을 하지 못해서 아쉬운 게 아니라, 나는 그 뜨거움과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견디지 못해 튤립밭을 뛰쳐나가 나무그늘에 앉아 있어야 했다.
꿈을 꿨다. 나는 담요를 두르고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있었는데, 어디선가 탱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곧 군인들이 아파트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고 나는 차분하게 나를 쏘아대는 군인을 바라보다 집안으로 들어가 몸을 피했다. 주변에는 나처럼 담요를 두르고 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떨리지는 않았다. 총격이 거세지고,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다며 다짐하는 순간 코로나 바이러스 모양의 폭탄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3초 후 그 폭탄은 펑 터지고 시야가 새하얘졌다. 잠시 후 나는 외국인 여군들에게 구해져 들것에 실려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갔던 비행기 좌석은 44번이었다. 이런 미신까지 믿고 싶진 않았지만 그건 참 공교로웠다. 비행기 좌석을 바꿔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미신을 믿어 일이 잘못될까봐 일부러 그 좌석을 바꾸지 않았다.
울고, 나는 회복할 수 있다고 다짐하다가 또 울고, 울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또 우는 게 지겨워졌다. 아빠가 힘들어서 전화하는 것도 싫다. 아빠를 위로해줄 순 있지만 나는 누가 위로해준단 말인가? 아빠가 내게 기대오는 게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