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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지막 길

안락사를 마주하다

by 밀리멜리

나는 외국의 어느 오래된 종합병원에서 일한다. 백년이 넘었다고 하던가. 백년된 병원답게 복도가 미로처럼 꼬불꼬불하고 어디가 어딘지 잘 찾기가 힘들다. 여기서 꽤나 일했다지만 아직 내 사무실과 가까이 있는 산부인과 병동, 중독회복병동과 카페테리아밖에 모른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원래 환자의 병실이었고, 사무실의 옷장 안에는 2인실이며 하룻밤 입원비가 25.5달러라는 스티커가 붙여 있다.


어느 날은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누군가의 끙끙대는 신음소리를 들려왔다. 그 고통스러운 소리가 2,3시간이나 계속된 것 같다. 우리 사무실 옆 병동이 바로 산부인과이고, 최근에 출산하러 온 산모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게 아이를 낳는 소리가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산부인과의 동료에게 놀러가 말을 걸었다.


"있잖아, 멜로디. 오늘 오전에 출산한 산모가 있어?"

"음... 새벽에 있었지."

"오전은 아니야?"

"오전은 아닌데. 왜 그래?"

"아니, 오전에 누가 소리지르는 걸 들어서..."

"너 사무실에서?"

"맞아."

"너 사무실까지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지. 출산실은 저쪽인데, 거기까지 들릴 리가 있겠어?"

"아니 뭐... 혹시 파이프를 타고 들려올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파이프라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내 생각에 그건 호스피스 병동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은데."

"뭐? 우리 병원에 호스피스 병동이 있어?"

"너 정말 모르는구나. 네 사무실 바로 위층이야."


나는 한 번도 내 사무실 위층으로 올라갈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지나치기만 했지, 그곳이 무슨 병동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번 올라가 보니, Soins palliatifs라는 말이 쓰여 있다. 고통을 줄여주는 케어라는 뜻이다.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들어가려면 벨을 눌러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들은 신음소리가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리였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게 아이를 낳는 산모의 소리라고 믿고 싶었던 건 왜일까. 이상하게도 죽음과 탄생은 너무나도 가깝다.


* * *


그리고 며칠 후, 동료 나디아, 오렐리와 함께 점심시간 공원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자그마한 할머니가 부축을 받으며 병원 입구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저는 여기서 이만 가볼게요."


부축해 주던 남자는 이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는 아마 택시기사였던 것 같다. 그 사람이 가버리자,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서 숨을 헐떡거리며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 병동으로 가세요? 도와드릴까요?"

"입원하러 왔지."

"입원 수속하는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택시기사를 대신해 우리는 할머니를 양 옆에서 부축했다. 입원 수속하는 곳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웠다.


"휠체어가 필요하겠는데... 입구에 왜 휠체어가 하나도 없지?"

"안되겠다. 우리 산부인과 병동에 휠체어 하나 있으니까 그거 가져올게."


나디아가 휠체어를 가져오는 동안 입원수속을 했고, 직원은 할머니의 이름과 병원카드를 보자마자 입원실 번호를 포스트잇에 적어주었다. Soins palliatifs,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내일 아침 9시야."

"내일 아침 9시요? 뭐가 내일 아침 9시라는 거예요?"

"그게 끝이라고."


할머니는 그러니까 이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러 온 거였다.


생의 마지막.


그것도 제 발로, 혼자서.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나디아가 곧 휠체어를 가져왔고, 우리는 휠체어를 밀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내 가는 길에 당신을 데려가네. 아가씨들은 천사야."

"우리 운명이 여기서 마주쳤네요."


오렐리가 대답했다. 운명이 마주쳤다고.


호스피스 병동 입구에 다다르고, 나는 이전에 지나치기만 했던 빨간 버튼을 눌러 간호사를 호출했다. 곧 파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우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혹시 잘못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간호사에게 포스트잇에 적힌 입원실 번호를 보여주었다.


"여기 맞네요. 네, 잘 찾아오셨어요. 보호자세요?"

"아, 아니요. 보호자는 아닌데... 그래도 잠시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할머니 이름은 실비였다. 그녀를 흔들의자에 앉히고 짐을 풀었다. 그렇지만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핸드폰과 노트, 오래된 가족사진과 손수건 정도가 다였다. 나는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무얼 가져올까 한번 생각해 보았다.


"핸드폰은 꺼 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귀찮을 뿐이야."

"가족들은요?"

"가족들은 멀리 있어. 칠레에..."


오렐리와 나는 병실에 남아 할머니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말했다.


"정말 착하시네요. 그런데 마스크는 꼭 착용해 주세요. 코로나 환자시거든요."

"네."


착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실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몇십 분은 선행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러 온 가녀린 할머니를 보고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했다. 죽기 전까지 너무 고통스러웠던 엄마, 진통제를 덜 써야지 치료효과가 더 좋다던 엄마의 의사... 그런데 이곳에서는 고통이 싫어서, 죽음으로 그 고통을 없애고 있다.


그 기묘한 이질감 때문에 실비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것이 엄마를 잃은 고통을 덜어주었는지 더해주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안락사, 눈앞에서 그걸 목격하는 건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실비를 만난 순간은 내 마음 속에 깊게 새겨져 있다.


부축이 필요하고 걸을 때마다 숨이 차지만 실비는 어떻게든 일상생활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안락사를 택했다. 그건 실비의 선택이다.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동시에 치료과정에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저 밀려오는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엄마.


호스피스 병실 복도에는 재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재단의 도움이 있다는 건, 안락사를 할 때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죽음이 그렇게 쉬운가? 그렇지만 고통이 없는 상태를 원한다면, 안락사는 고통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어느 책에서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런 걸까.


안락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락사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나는 항상 반대편이었는데. 실비와 잠깐 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부터는, 논리로 안락사에 대한 찬반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논리와 증거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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