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두려움 사이
엄마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 고마운 가족이라는 것.
솔직히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버지보다도 어렵다.
인생을 말하기엔 짧은 23년, 엄마와 함께 살아왔지만 그 속을 도통 알 수 없다.
항상 나에게 웬만한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온실 속 화초 같이 느껴질 수 있겠지만, 중요한 일은 대부분 본인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시기에 어쩔 수 없다.
내가 도와드리는 건 잔심부름 같은 간단한 일이다.
어린 시절 도와드리겠다고 설거지를 해본 적이 있다. 친구들도 설거지 정돈 해봤다고 하고, 청소 같은 것들도 도와주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나도 칭찬을 받을 생각에 해봤던 것 같다. 어릴 적엔 몰랐다. 엄마에게 있어서 그런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여기저기 튄 물, 아직 세제가 묻은 그릇, 기름기가 씻겨나가지 않은 그릇, 그걸 본 엄마의 입장에선 일거리만 늘어난 꼴이다. 그때부터 내가 무엇을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굳은 말. "네가 해봤자 일만 늘어나지"칭찬을 받을 생각에 신이 나 있던 내 기대는 순식간에 깨져버렸고, 마음은 상처받아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나에게 청소 같은 것들을 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빨래, 청소기 등등 집안일을 시키실 때마다 열심히 해보려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말들 뿐이었다.
"이걸 왜 이렇게 해?", "에라이 이럴 거면 하지 마", "조금 편하려고 시켰더니 귀찮다고 대충 하는구나"
이런 말들
자세하게 말해주는 일은 없을뿐더러 내가 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면 화난 듯 뺏어서 해버린다.
물론 내가 일머리가 없어서 였을지도 모른다.
나도 어디 가서 뭐든 곧잘 해내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어린 시절은 아버지보다 엄마가 훨씬 좋았다.
엄마의 기분이 좋으실 때면 항상 애정을 쏟아부어주고 예쁨을 받았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화가 난 엄마에게 맞으면서, 욕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잘못해서 혼나는 거야"
어느 날부터 자기 전에 왜 혼났는지 생각해 보고 다음부턴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무섭다. 그래도 엄마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말을 안 들어서 저럴 뿐이지."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같은 잘못을 해도 왜인지 나만 더 크게 혼나고, 더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기분이 좋을 때 슬쩍 물어봤다.
"왜 나한테만 그렇게 화내는 거예요?"
엄마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첫째라서 그래. 부모는 원래 첫째한테 기대하게 되니까."
그런 거구나라며 넘어갔던 그 말이 나에겐 족쇄가 되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이혼하면서 친척들은 나에게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이젠 아빠가 없으니까, 엄마한테 첫째인 네가 잘해야 해."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삼촌들도, 다들 똑같은 말만...
그때부터 나도, 엄마도 심리적으로 몰려있었던 것 같다.
이혼 후 어느 날 우리 집 가구에 빨간 종이쪼가리가 붙어있었다.
분명 우리 집인데,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엄마와 거실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매번 엄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잔뜩 걸려왔고, 그걸 받을 때마다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결국 엄마는 일하게 되었다.
일을 하시게 된 엄마는 바빠졌다.
집에선 집안일을, 나가선 식당에서 일을
매일 같이 반복되었다.
엄마는 늘 저녁 8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셨다.
그리곤 저녁 식사와 함께 술을 마셨다.
많이 마시면 좋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취해야 잘 수 있다며 소주 1병에서 2병을 비우셨다.
나는 기억한다.
매일 술에 취해 그대로 잠든 엄마를,
열심히 주물러드렸던 딱딱하게 굳은 발바닥을,
아버지가 없지만 나와 동생, 엄마가 함께 있던 그 집을.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엄마는 여전하셨다. 일이 피곤해서인지 늘 날이 서 있었다.
말 한마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셨고, 화가 더욱 많아져 맞지 않는 날이 없었다.
당시 교회를 다니던 나는 예수님한테 기도했다.
"하루라도 좋으니까 엄마가 때리지 않게 해 주세요."
맞는 부위와 이유는 너무나 많다.
머리, 배, 등, 팔
꼭 주먹이 아닌,
머리채를 잡히는 날도 있었고 발로 걷어 차인 적도 있다.
그럼에도 멍이 들 정도로 맞진 않았기에 심하다고 생각해도 누구에게 말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는 늘 소리를 치며 협박했다.
"그럴 거면 너네 아빠한테 가!"
화가 진짜 심하게 난 날은 캐리어에 우리 옷을 집어넣고 택시를 부르는 시늉을 하거나,
본인의 옷을 가지고 집 밖에 나가서 하루가 지나서야 들어오기도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매일 울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도
눈을 감으면 슬펐던 일이 먼저 생각나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서웠다. 버려질까 봐.
아버지는 우릴 키우지 않겠다고 했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마저 우릴 버리면?
엄마를 탓하는 일은 없다.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버림받지 않는 길. 난 무조건 그 길을 골라야 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벼 잘못했다고 빈다.
발로 걷어차여도 미안하다고 매달린다.
눈물에 앞이 보이지 않아도
맞은 곳이 아프고 시려도
그럼에도 엄마는 우릴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들을 연기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매일 밤 서투르지만 계란 프라이를 하거나, 라면을 끓여주었다.
설거지도 꼼꼼하게 해 보고 칭찬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더 이상 엄마에게 내가 단순한 짐덩어리로 느껴지게 만들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자신을 탓했다.
그걸로 엄마의 폭력을 합리화했다.
그것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엄마의 무거운 짐을 덜어드리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