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 이후,
다행히 반대편 갑상선 검사는 괜찮은 것으로 나왔다. 퇴원을 하고 집에 와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 조금은 실감이 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었고 다행히 집에 친정부모님이 함께 사셨기 때문에 푹 쉴 수는 있었다. 등하원을 대부분 해주셨고 아이들이 등교한 후에는 조금씩 공원을 걸으며 체력이 돌아오길 바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술 이전의 나는 ‘각성 상태’로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수술하기 전부터 계속 상담을 받았었는데 상담을 해주셨던 선생님이 내가 많이 안정된 상태라고 하셨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있다는 것에 어느정도 공감한다. 그런데 육체적으로는 안정되었다고 해야할지 둔감하다고 해야할지 그 지점이 참 애매한 것 같다. 육체적으로 나는 왠만해서는 피곤하지 않았고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을 더 못견디는 스타일이랄까. 무언가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늘 있어서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서 힘든 것은 잘 못느끼고 이정도면 괜찮네, 할 수있네 라며 내가 다 감당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걷기만 하고 와도 피곤해서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수술 후 일주일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또 무모하기 짝이 없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약 10km의 거리를 갔다. 그 때 의사선생님께 자전거 타고 왔다고 하니 놀라셨긴 했지만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던 사람은 수술 후에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얘기해주셔서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무리하는 성격 때문에 몸이 고생하고 그래서 몸이 힘든 것을 잘 알아야되서 나에게 그런 병이 찾아왔을까 싶기도 했다. 어렸을 때 교사였던 아버지는 (방학때는 매일)나를 데리고 등산을 자주 하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0m의 낮은 산이었는데 매일 오르고 또 오르다보니 정말 등산이 싫었던 기억이 남는다. 그런데 오빠와 나는 지금 스스로를 체력이 매우 좋다고 얘기하고 있고 그런 점이 일을 하면서도 장점이라고 얘기했었다. 체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체력이 약해졌고 앞으로 나의 체력을 배분해서 사용해야된다는 점이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하고 선별해서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슬펐다. 그런데 결국 나의 긴 인생에서 내가 배우고 또 배워야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는 것. 내가 다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아프고 나서야 깨달아진다는 것이, 어찌보면 나에게는 선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삶에 의미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나는 배웠어야했던 것 같다. 나는 누군가를 꼭 만나고 싶었고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었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결국 강박에 가까웠고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생에서는 때론 가만히 있어야 될 때가 있다. 아픈 몸을 회복하기 위해 쉬어야 할 때가 있고, 번아웃이 와서 지루하고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다시 일상을 되찾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우게 될거라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었다.
수술 이후의 나에게는 일단, 이제는 나에게 암세포가 없구나라는 것에 마음이 많이 평온해졌던 것 같다. 그 전의 나는 ‘내가 암환자라니.’ 라는 생각이 내 머리 옆을 계속 해서 뱅글뱅글 도는 듯 했는데 일단 그 멘붕상태가 많이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체력은 떨어졌지만 입원해서 아이들을 보지 못하던 상황보다는 아이들을 매일 볼 수 있는 것도 심리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매일 똑같이 걸었고 그 때의 공원은 단풍이 지고 있어 참 아름다웠다. 혼자 걸었지만 눈 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여행지의 모습으로 날 반겨주고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