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익명이라는 이름의 완전한 자유

본비은혜

by 엔도르핀 본비


한때 나는 드러나는 삶을 사랑했다. 누군가의 시선 끝에 머물기를 원했고, 무대 위 주인공처럼 돋보이고 싶어 했다. 그때의 ‘그’는 나의 가장 열렬한 관객이자 조력자였다. 어디서든 나를 부추겨 빛나게 했고, 그의 보이지 않는 응원에 힘입어 나는 기꺼이 세상의 중심에서 즐거워했다.


하지만 오늘, 나는 낯선 자유의 맛을 보았다.

형님댁에 묶어 둔 왕이와 산책을 하다가 그의 친한 후배를 마주칠 뻔한 순간, 나는 그동안의 내가 아니었다. 뒤통수만 봐도 달려가 이름을 불러 세워야 직성이 풀리던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기꺼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았고,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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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보니, 참아지더라.

반드시 아는 척을 해야만 존재를 확인받는 줄 알았던 내가, 스스로를 감춤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정 많고 다정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나는 대단히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먼저 인사를 건넸다면 상대는 반갑게 응해 주었겠지만, 나는 그 짧은 찰나에 고개를 돌리는 쪽을 택했다. 나를 향해 쏟아질 끊임없는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내뱉어야 할 나의 이야기들이 피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돌아선 길 위에서 자문해 본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오갈 수많은 말들이 무엇이 두려워 이토록 애써 외면했던 걸까.


그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 이제는 타인의 언어로 정의되는 내가 아닌, 오직 나만이 아는 나의 고요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설명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난 지금, 평화로움을 만끽한다.

익명성이 주는 이 서늘하고도 안온한 자유가, 지금의 내게는 가장 절실한 위로였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20년 동안 문화해설을 한 것이 자산이 되어, 십자가 전시회의 해설을 맡았다. 해설을 마칠 때 받는 박수가 반갑다. 익숙한 박수 소리와 함께 마지막 인사를 마칠 때쯤, 한 분이 조심스레 안부를 물어왔다.

"남편분 건강은 좀 어떠신가요?"

그 질문 앞에서 나의 시간은 잠시 멈췄다. 해설하는 내내 지었던 밝은 미소가 나의 평안을 증명이라도 한 것일까. 그는 아직 나의 상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애써 웃음을 머금은 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문장을 담담히 꺼내 놓았다.

"그는 두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미안하다 말하는 그에게 나는 괜찮다며 되려 위로를 건넸다. 타인의 사정을 다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곁에 있던 이들까지 어쩔 줄 몰라하며 미안해한다.

괜찮다고 말하는 나의 입술과 달리, 눈가엔 눈물이 차올랐다. 눈치 없는 눈물은 때를 가리지 못하고 툭, 떨어져 내린다. 허둥지둥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서 휴지를 찾는 내 뒷모습 위로,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그들의 미안한 시선이 꽂힌다.

상대의 관심이 고마우면서도, 툭 치면 툭 터져버리는 나의 말랑한 마음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이내 내 마음에게 나지막이 속삭여본다. '지금은 그저 충분히 슬퍼해도 되는 시간이야'라고.

참 다정했던 우리의 사랑, 내 생애 가장 빛나던 연인의 빈자리가 어찌 그리 쉽게 메워질 수 있을까. 나의 애도는 언제쯤 끝이 날지, 과연 그 끝이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상실의 무게를 온전히 견디며 그를 그리워하고 싶다. 참으려 애썼던 날들보다 더 깊게, 더 충분하게.


찬 기운이 감도는 여주 보통리, 청사 조성환 고택에 어둠이 내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7주년을 기념하는 <청사 조성환을 만나다> 달빛음악회.

공연 시작 전 도착해 고택의 안팎을 거닐며 봄 저녁의 운치를 만끽해 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별은 선명해지고, 무대는 빛을 발하며 밤의 깊이를 더해간다.

문득 2024년 시월, 조선왕릉축전에서 보았던 드론라이트쇼의 밤이 떠올랐다. 그때의 가을밤도 오늘처럼 서늘했다.

이제 막 암 선고를 받은 그는 그 자리에 함께 갈 기운이 없었다. 몸의 통증에 앞선 더 깊은 절망이 그를 주저앉혔을 것이다. 두 딸과 함께 본 드론쇼는 눈부시게 근사했지만, 홀로 두고 온 남편 생각에 마음 한구석은 내내 시리고 아쉬웠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 막연한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오늘 이 고택의 서늘한 공기가 다시금 깨닫게 한다.

공연 내내 그가 떠올랐다. 함께였다면 이 정취를 얼마나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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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처마 끝으로 깊어가는 밤, 고개를 들어 마주한 밤하늘에는 유난히도 반짝이는 별이 떠 있었다. 그 별빛은 시월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함께하지 못해 못내 시렸던 나의 아린 마음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는 듯했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고, 나의 빛남을 부추겨주던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화려한 시간들을 지나, 이제는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기꺼이 이름 없는 한 사람으로 군중 속에 섞여 드는 법을 배운다.

아는 얼굴을 마주쳐도 애써 고개를 돌린 것은 차가움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온전하게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안온한 도피처였다.

툭 터져 나온 눈물과 함께 내뱉어야 했던 남편의 죽음에 대한 그 아픈 진실조차, 이제는 누군가의 위로가 아닌 나만의 애도로 간직하고 싶다. 짐짓 괜찮은 척 웃어 보이지 않아도 되는 곳,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공간에서 비로소 투명해진다.


오늘 밤 고택에서 마주한 저 별은, 어쩌면 나를 대신해 빛나주고 있는 그의 인사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흐르는 대로 스며들어 너의 평온을 찾으라"라고 말해주는 듯한 저 별빛 아래서, 나는 비로소 긴 긴 애도의 터널을 지나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간다.

드러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익명이라는 이름의 완전한 자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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