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내 이름으로 살게 해 주세요.

by 본비 은혜

나는 오 남매의 둘째 딸로, 언니와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한 명 있다.

김해 김 씨 시조 김수로왕으로부터 72대손으로 돌림자가 종(鐘)인 집에 태어났다.

그런데 오 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나만 이름에 항렬자가 없이 '은혜'라서, 어려서 엄마한테 혼나고 나면 '주워온 아이'라는 생각에 움츠러들었다.

그땐, 왜 그렇게 어른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허무맹랑한 말들을 재미랍시고 했는지.

그걸 듣고 자란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와 소외감이 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생각하니 그 시대, 그 어른들이 참 야속하다.


어쩌면, 나의 눈치 빠름은 그 주워온 아이라 다시 버림받지 않으려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둘째라는 설움은 늘 있었다.

맏딸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서 이천 장날이면 할머니를 따라 나가, 짜장면이나 맛있는 것들을 먹고 왔다는 자랑을 했었다.

장남은 종손이라고 마을에 하나뿐인 구판장을 무한히 이용할 수 있도록 외상권을 할머니께서 부여해,

언니와 나는 동생을 꼬드겨 맛있는 군것질 거리를 했다. 할머니나 엄마는 다 아시면서도 눈을 감아주셨다.

주워온 아이의 타이틀은 자랄수록 엄마와 똑 닮아서, 동네 아줌마들의 농담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게 되었지만, 왜 나만 항렬자, 돌림자를 쓰지 않았을까? 혼자서 늘 궁금하긴 했었다.


아이를 낳고 나니, 돌림자도 없는 특별한 내 이름이 없어졌다.

큰 딸애 이름, "00이 엄마"로만 불렸다.

강변 나 홀로 아파트에서 아줌마들과 재미나게 살던 그때는 다들 누구 엄마로 불렀다.

그게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어떤 이의 글을 읽으면서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게 되었다.

잊고 살았던 내 이름, 나도 이름이 있었구나.


둘째를 낳고 나서였던 것 같다.

그 무렵, 큰 딸아이는 나에게 직장을 다니길 바라면서 동생은 자기가 학교에 데리고 다니면 되니, 엄마는 직장을 나가라고 했었다. 젊은 엄마가 집에만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랬는지.

그 말이 어쩌면 나를 자극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가 내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긴 때인 것 같다. 우리 집에서 특별한 내 이름, 크게 불릴 일이 없는 이름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제 이름으로 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00엄마라는 이름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잃어버린 나를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

눈을 감으면 마가다락방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던 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거창한 무엇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수식어가 아닌, 내 고유한 이름이 불리는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시키는 것을 참 잘하는 순종형의 사람이다.

주워 왔으니 잘해야지 하는 눈치 속에서 체득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야만 하는 속회예배 가족이 있었다. 60대 어르신의 집인데, 시골이라 대중교통이 원활하지도 않을뿐더러 관절염으로 다리가 불편하시니 기동력 있는 나에게 그분을 챙기길 바라며 속회를 편성해 주셨다. 난 돌쟁이 둘째 아이를 데리고 매주 속회를 다녔다.

1년, 2년, 3년.... 차츰 지쳐갔다.

미안해하시고 고마워하시는 권사님을 만나는 것은 좋은데, 집에서 나가기가 꾀가 나고 그가 종종 어딜 그렇게 다니냐는 잔소리를 하면 힘이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 댁으로 가는 길에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참아왔던 마음이었는지.

"하나님!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진짜. 남편 잔소리를 들으면서 가는데, 이 길 위에서 뭐 하나 주시면 안 돼요? 제발 하나는 주셔야 하는 거 아녜요? 집이든, 땅이든, 직장이든! 제발 뭐 하나라도 주세요"

저절로 나온 기도를 마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집도 안 보이고 직장이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뭐지. 논, 밭 밖에 없는데, 무슨 직장은..' 기도한 내가 웃겼다.

그 기도는 희한하게도 그 권사님 댁 가는 길, 같은 자리에 오면 의식하지도 않는데도 중얼중얼 내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논, 밭을 보면서 같은 기도를 하곤 했다. 이상하다, 하면서.


사방으로 논, 밭만 보여서 속으로 '땅은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슬쩍 들었다.

경매로 나온 땅을 입찰을 하면서 내심 기대를 했다. 내가 그렇게 기도를 했으니까.

그런데 안 되었다. 또다시 ' 하나님! 너무 하세요' 기도가 나왔다.


직장을 소망하기보다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기도를 했던 거 같다.

작은 아이가 5살이 되던 해에 나는 일을 갖게 되었는데, 그 길에서 보이지 않던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왕릉에서 해설사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김은혜. 내 이름이 불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 길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 이름이 불리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신기한 체험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내가 의식해서 하기 이전에 주님이 하게 하는 것 같다. 논, 밭 밖에 안 보이는 내게 '직장'까지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 내내 이상했지만, 늘 같은 기도를 했었다.


그 후,

15년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리는 그 길 중간쯤에 땅을 사서 집을 짓는 축복을 받았다.

내가 기도한 것을 다 주셨다. 결국 다 받았다.


그가 맑은 모습으로

"지금까지는 000의 처, 아내 김은혜였지만, 이제부터는 김은혜(남편 000) 여야 해. 네 이름 뒤에 내 이름이 있어야 하는 거야. 이젠 네 이름을 앞에 두고 살아. "

단순히 호칭의 순서를 바꾸라는 의미를 넘어 나를 한 인격체로서 온전히 존중하고, 앞으로 당당히 홀로 서 가기를 바라는 가장 숭고한 바람처럼 들린다.

그동안 그의 아내로 살아온 삶을 충분히 인정해 주면서도, 이제는 '김은혜'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눈물겹도록 따뜻했다.

그의 정리는 도대체 어디까지 인지.


그는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게 아니고, 내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 같다.

아주 오래 전의 기도는 이렇게 응답이 되어간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조급함보다 늘 정확하며, 우리가 기다리지 못할 뿐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 투덜거리는 마음까지도 아시는 주님께서 저의 작은 순종을 기쁘게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도 '감사'라는 나침반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제가 알지 못하는 주의 크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며 묵묵히 걷게 하소서. 어떤 순간에도 감사가 저의 인생에 끊이지 않는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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