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당신의 손을 거쳐 내게 온 축복

말기암환자를 사랑하는 아내

by 본비 은혜

나는 유난히 노을을 좋아했다.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날 때면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노을이 시작되는 시간, 혹은 해가 가장 예쁘게 지는 길 위라면 어디든 좋았다.

"어디로 가볼까?" 묻는 나의 무계획적인 물음에도 그는 기꺼이 나의 낭만이 되어주었다.

여주대교를 건너던 어느 날이었다.
강물 위로 쏟아지는 노을이 너무도 예뻐 차창 밖으로 연신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대던 나를 보고, 그는 말없이 차를 돌렸다. 한 번 더 보라고,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눈에 담으라고.


나의 유난스러운 취향을 '유난'이라 치부하지 않고 존중해 주던 마음. 아내의 사소한 기쁨을 연장해 주기 위해 기꺼이 핸들을 꺾던 그 남자의 뒷모습은 세상 그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낭만이었다. 나는 그 길 위에서 사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런 사람의 곁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이었다.


요즘 나는 병원을 오가며 다시 노을을 본다.
이상하게도 수평선 너머의 매끄러운 노을보다 산등성이나 송전탑, 우직한 나무들에 걸린 노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 굴곡진 실루엣이 우리 인생의 고비마다 새겨진 나이테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함께 거쳐온 크고 작은 사건과 사연들, 그 '인생의 흔적'들이 노을빛에 걸려 빛나고 있었다.

여주 집에서 용인 샘물호스피스병원으로 향하는 길, 나는 붉은 노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 길 위에서 지난날을 복기해 본다. 젊은 시절부터 나의 기도는 늘 한결같았다.
"하나님, 저에게 복을 주실 때는 꼭 남편의 손을 통해서 주세요."

남편이 가장으로서 당당히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잘나서 무언가를 얻으면 혹여 그를 업신여길까 봐, 모든 복이 그의 손을 거쳐 나에게 오기를 기도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늘 내가 바라는 것 이상을 해주었고, 내가 놓치는 작은 마음들까지 세심히 챙겨주었다.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두 아이, 안정된 직장과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 돌이켜보니 살면서 마주친 모든 이들이 선한 인연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삶이다.

우리의 노년이 아름답기를 바랐던 소망처럼, 지금 마주한 노을은 비록 마지막을 닮아 애잔하지만 충분히 찬란하다. 비록 고통스러운 병마와 싸우고 있을지라도, 그가 보여준 헌신과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이 아름다운 굴곡들이 있기에 우리의 노을은 외롭지 않다.

따스한 기억들을 품에 안고, 나는 오늘도 저물어가는 노을 속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에게로 간다.


지상에 있지만 천국과도 같은 곳, 나는 지금 샘물 호스피스에 있다.
이곳에서 나는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산다. 매일 저녁이면 그날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조잘조잘 들려주던 버릇을 병실에서도 놓지 않는다. 그가 듣고 있는지, 아니면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좋아할 말들을 부지런히 만들어낸다. 그에게 들려줄 다정한 소식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는 이곳 샘물에 와서 "너무 고맙고 많이 배우고 간다"라고 했다. 이런 곳을 진작 알았더라면 자신의 삶이 조금은 더 달랐을 거라며, 진심 어린 고백을 해, 그 진심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라면 기꺼이 하고도 남았을 일들을 하나씩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는 그의 이름 '000'이 누군가에게 한 번 더 따뜻하게 불리게 하는 것이었다.
평소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하기를 좋아했던 그의 마음을 담아, 그의 이름으로 떡을 준비했다. 영양사님께 간곡히 부탁드려 가장 맛있는 떡을 주문했다.

지난 주일 점심, 병원의 많은 이들과 그 떡을 나누어 먹었다. "잘 먹었다"는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를 위한 작은 행함일 뿐인데, 쏟아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칭찬들을 모아 그에게 달려갔다.

"여보, 나 잘했지? 많은 사람이 당신 이름으로 낸 떡을 정말 맛있게 먹었대. 당신도 행복하지?"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늘 대접하기를 좋아했던 그의 마음이 내 목소리를 타고 그의 영혼에 닿아 환하게 피어났으리라는 것을.

비록 대답 없는 대화일지라도, 우리는 이 찬란한 일상을 여전히 공유하고 있다.

천국의 문턱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로 살아가고 있다.


2월 1일의 기록을, 추억을 올립니다.


#취향존중 #추억 #부부이야기 #노을 #대답없는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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