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세상에서 가장 속 편한 밥상

그가 남긴 숙제

by 본비 은혜

나는 요즘 그가 남기고 간 '숙제'를 하나씩 해나가는 중이다.


그는 식도락가였다.

오래전, 오로지 도다리 쑥국 한 그릇을 먹겠다고 토요일 오전, TV를 보다 말고 통영까지 달릴 만큼 음식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저녁을 잘 먹고, 그제야 숙소를 찾아봤다.

'뭐, 이 봄에 숙소가 없으려고?'

세상에, 통영시내를 다 돌아도 우리가 하룻밤 머무를 방이 없다.

숙소도 잡지 않고 떠난 통영에서 국제음악제 인파에 밀려 결국 찜질방 바닥조차 구경 못 하고 밤새 집으로 돌아왔던 날. 우리는 그 황당한 여정조차 '저녁 한 끼 잘 먹었으면 됐다'며 웃어넘기곤 했다.


맛집 앞에 줄 서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던 그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며 '그들만의 맛집'에 몇 번 실망한 뒤로는 더욱 그랬다. 줄 설 사람이 아닌 그가 지난 11월 어느 날부터인가 교회 식당의 긴 줄을 기꺼이 견디기 시작했다. 줄을 서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가 참 어색했고, 식판을 들고 빈자리를 찾아 헤매는 수고로움을 기쁨으로 감수하며, 그는 연신 "교회 밥은 맛있다"며 감탄했다.

그 밥을 먹고 집에 오면, 신기하게 교회 밥은 속이 편하다고 했었다.

어느 날, 그는 제육볶음을 참 맛있게 먹고 나서는

"우리도 나중에 꼭 한번 대접하자. 돼지고기 말고 소불고기랑 제일 맛있는 떡으로 말이야."


그것은 그가 내게 남긴 숙제였다.

병원을 나서면, 기도를 보태준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서른 해를 넘게 산 아내는 그 말속에 담긴 진심의 무게를 안다.

오늘, 교회 주보 광고란에는 그의 이름이 빠진 채 내 이름 석 자만 오롯이 적혀 있었다. 하필 내가 광고방송을 맡은 날이었다.

"김은혜 권사 가정에서 점심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늘 고유명사처럼 붙어 다니던 우리 이름에서 그의 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이 낯설어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 또한 내가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식당 총괄 권사님과 상의해 정성껏 메뉴를 짰다.

미역국과 시금치, 소불고기와 김치, 그리고 쫀득한 녹두 인절미. 솜씨 좋은 봉사자들의 손길을 거쳐 전골팬에 불고기가 맛있게 끓고, 초록색 이쁜 시금치나물과 맛있게 익은 김장김치로 식단이 차려졌다.

식사 내내 "잘 먹었다"는 인사가 쉴 틈 없이 밀려왔다.

많은 분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할 수 있어서 참 뿌듯했다.

그가 내준 숙제 하나를 한 것뿐인데, 오후 내내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 메시지를 받았다.

딸아이는 "기도하는 분들이라 그런지 인사 글들이 참 감동이에요. "라며 웃는다.

아무렴, 성경을 읽고 기도하시는 분들이니 마음이 벌써 다르지!


문득 궁금해졌다.

왜 그는 그토록 교회 밥을 좋아했을까? 왜 그 밥은 유독 속이 편했을까?

나 또한 샘물 호스피스에서 먹었던 소박한 식단들을 떠올려 본다. 비결은 명확했다.

그 밥상에는 '이익'이라는 계산이 빠지고 '사랑'이라는 조미료가 추가되어 있었다.

식사하는 그에게 다가와 "금방 나을 거야", "많이 먹고 힘내요"라며 얹어주던 떡 한 조각, 반찬 한 젓가락.

그는 그 따뜻한 응원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랑이 좋아서, 그 사랑을 받으러 그는 기꺼이 줄을 서면서 그 밥을 기다렸을 것이다.

긍휼 한 마음으로 짓고 기도로 버무린 음식은 그 자체로 보약이 된 것이겠지.


나 또한 식사 기도를 올리며 바랐다.

오늘 이 밥상을 먹는 모든 이에게 든든한 한 끼를 넘어, 사랑의 교제를 통해 마음의 허기를 채우길.

수고해 주신 손길들을 위해 축복해 주시길 기도했다.

그가 내준 숙제 하나를 무사히 마쳤다.

가고 없는 그와 남은 나는 지금 받은 사랑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조용히 흘려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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